광고를 써야 하는데 고민이 앞섭니다.










핑크 파인애플과 동급생을 기억하시는 당신에게☆라고 해야 좋을지.

로고를 보고도 잔망스럽게 시치미를 떼시겠다면 귀작은 어떨까?!!!!


애국 보수와 팩트에 환장하는 벌레를 모티브로 쪄낸 사이다썰을 보고픈 당신에게, 라고 해야 좋을지.

(버러지의 일상에 꿈과 희망을 끼얹어 요리하지만 마지막에 인실좆을 후드리찹찹 얹어 완성함. 암 유발용이 아니라 사이다니까.)


뽑아서 월급 줬더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지들끼리 지지고 볶느라 바쁜 님들 계옵신

국회의사당 가서 데스매치를 벌이면 어떻게 될지 궁금한 당신에게, 라고 해야 좋을지.


적고 보니 폭력이라는 맥락은 한 가닥일지언정 폭이 참 드넓은 책이네요.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이 책 수위 꽤 높습니다.





속지에 이게 깔려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


야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고 참 그렇습디다.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문장도 퍽 폭력적입니다.

책 펴고 몇 줄 읽고 나면 멱살 잡혀서 쭉 끌어당겨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쭈 이거 안 놔 하는 사이에 이미 페이지 넘어갑니다.


예를 들어 마지막 단편인 ‘학원기숙사 일족’으로 키워드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연상, 연하, 유부녀, 여왕, 비서, 하렘, 조교, 감금, 노예 등등.

어쩐지 매우 익숙합니다. 주연 배우가 누군지 제작사가 어딘지 도쿄핫인지 헤이조인지 궁금하시겠지만

아쉽게도 해외직구로도 이 DVD는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책으로 읽읍시다.


이 책의 표제이자 중심적인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국회의사당 학살 사건’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질척합니다. 


책을 읽은 뒤에 봄날 꽃바람 같은 아름다움을 곱씹으며

잔잔한 감동의 여운을 맛보고 싶으시다면-





에비, 지지.

이건 니들 게 아닙니다.


잠깐 시점을 바꿔 옆길로 새볼까요. 

최근 범죄 드라마 ‘나쁜 녀석들’이 한참 주가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 범죄 수사물 드라마의 매력 포인트는 뭘까요?


⓵ 피해자 인권 대신 가해자 인권이나 챙기는 같잖은 법은 무시해준다

⓶ 대신 권선징악, 도덕 관념은 일반인이 공감될 만큼 챙겨준다

⓷ 현재 사회에서 벌어질 법한, 혹은 벌어졌던 사건들을 재조명해 삶아서 락스 소독한 듯 명쾌상쾌통쾌하게 정리해준다

⓸ 연애질 안하고 나쁜 놈들을 잡는다

⓹ 동석오빠빠빠왈왈왈와르르르


더 있겠지만 상중오빠!!!!!!! 일단 이 정도인 듯합니다.

악인들을 시원하게 처단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데 정작 항암제를 숨처럼 들이켜야 하는 게 현실이죠.

최근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이 여실하게 보여주듯 말입니다.


피해자 측은 겨우 목소리만 내면서 최소한의 처우와 개선을 요구하는데 오히려 가해자가 당당합니다.

제대로 처벌을 하는 경우도 보기 힘들고요.


오죽하면 사람 패거나 강간할 때는 술 마시고 하라고 하겠어요.

강도가 칼 들고 내 집에 쳐들어왔어도 그놈 후려패서 어디 다치면 과잉방어라 내가 깽값 물어줘야 된답디다.

뭣같습니다.










암 안 걸리려면 치킨을 시키든, 마음의 장바구니를 털어 현실의 잔고를 날리든, 운동이라도 하든 해야겠죠.

그 발암유발 방지 방법 중 하나로 이 단편을 슬쩍 끼워놓겠습니다.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국회의사당 학살 사건’


가끔 그렇잖아요. 아, 이 나라 살기 싫다 싶을 때.

그런데 그게 땅이 싫은 거겠어요, 한글이 싫은 거겠어요?


외국에 비해 모국어라 말도 잘 통하고 음식도 먹을 만한데 왜 굳이 이민을 가고 싶을까요?

그야 다른 요소들 때문이죠.


그리고 그건 서민으로서 근근이 살겠다는데 자꾸 우리 맘과 법과 세금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윗물 때문이 크고요.

자꾸 서민을 극빈자 민초로 만들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가끔은 계급장 떼고 국민 대 그분들로 조져버리고 싶을 때 있죠?

물론 마음만요. 


정당방위로도 사람 못 칠 선량하고 순박한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치겠어요.

그러니 대리만족 해봅시다.


그분들을 도마 위 닭처럼 조각도 내 보고

관절도 나눠보고

껍데기도 뜯어보고 하면서


잘못했다 소리가 절로 입에서 나올 정도로

조져드립니다.


대놓고 잔인해요. 

제가 반사회적 성향이 넘쳐서 그런지 재밌고 속 시원하더라고요.

(*작가님의 의도와는 무관합니다.)


조금만 발췌를 해볼까요.






국회의사당은 의외로 쉽게 점거당했다. 목적도 밝히지 않은 채, 치타사난다는 외부와 연락을 끊고, 국회의원을 제외한 직원과 보좌관 등을 국회의사당 밖으로 내보냈다.

국회의사당에서 일명 데스매치라고 불리는 프로레슬링 경기 방식으로 국회의원이 하나하나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동안, 초기 대응은 서투르기만 했다. 매뉴얼도 없이, 설령 있더라도 매뉴얼 실행에 따르는 판단을 담당할 책임자도 없이, 인맥에 의존해 전화 한 통으로 일처리를 하는 이 나라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국회의원들의 주검은 하나같이 온몸이 난자되고, 관절이 부러지고, 피부가 뜯겨 나가고, 압정과 형광등과 철조망의 조각이 고슴도치처럼 박힌 채로 발견되었다. 이미 사람이 아니라 토막 난 고깃덩어리로만 여겨질 정도였다. 영화 속 특수효과로 구축한, 그로테스크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종교적 제의의 폭력적 미장센이었다.(중략)






흠, 이거 뭔지는 몰라도 잔인해서 좀…….












꼬시다. 아잉 꼬수벙. 

(정색) 꼭 피해자 캐릭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님.


에이, 우린 순박해요. 이건 다 소설이고 판타지임.

사람이 야동을 봐야 현자타임이 오듯,

잔인한 판타지도 대리적 간접 경험으로 접해야 욕구가 풀리는 법입니다. 


그런 거 안 풀고 놔뒀다간 홧병이 나거나
















일그러진 공격성향의 발로로 거주지 및 식단, 일정 등이 국가에 의해 고정될 수 있습니다.

은팔찌는 돈 주고 사서 끼는 쪽이 더 어여쁘잖아요♡


그러니 이 책을 읽고 느낄 카타르시스로 망상을 대체하여, 건강한 멘탈을 유지해봅시다.


이렇듯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며 선정적이면서도 흡인력 넘치는 재미난 소설책 한 권,

올 가을 옆구리에 끼고 품격을 높여보심은 어떠신가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인터넷 서점 및 각종 오프라인 서점에서

온우주 출판사의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국회의사당 학살 사건’을 찾아주세요.


상시대기, 신속정확하게 당신의 울분을 썰로 풀어드립니다!





이 또라이 소년이 사랑스러운 이유에 대해





그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질문지를 확인할 겸 다시 한 번 소설들을 되짚어 읽다가 버스 안에서 끅끅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 진행된 와중에도 삼촌은 짧은 휴식시간을 갖겠다며 감시 카메라가 보여주는 서울의 광경을 재차 확인하며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김꽃비들의 자태를 감상했다. 광화문 광장을 점거한 김꽃비들. 한강 다리를 메운 김꽃비들. 동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김꽃비들. 홍대 맛집에 줄 선 김꽃비들. 서울 곳곳에서 김꽃비를 볼 수 있었고 삼촌은 그 광경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넣겠다는 듯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아 화상아. 아 미친놈아. 

― 「일천만 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중


작중의 ‘상황’이란, 작중의 ‘삼촌’에 의해 모든 서울시민이 배우 김꽃비 -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A%BD%83%EB%B9%84 여기까지 들어와서 이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설마 이 배우를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링크를 달아본다.)

가 되어버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조차 김꽃비에 대한 열렬한 팬심에 불타오르며 황홀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삼촌을 향해 조카는 “아 화상아. 아 미친놈아” 라고 중얼거린다. ‘아’ 뒤에 말을 끊는 쉼표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내 폭소를 이끌어낸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것은 그 자체로 너무 자연스러운 입말이었다. 조카는 삼촌을 향해 분노할 힘도 잃어버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뱉는다. 그 ‘기가 막힌’ 에너지는 삼촌을 말리지는 못하지만 이 소설집 전체를 신명나게 끌고 간다.



인터뷰 장소는 우동집이었다. 약속 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우동을 먹어치우고 나서 맥주를 한 잔 시켰고, 그는 컵케이크를 꺼냈다.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어지는 게 싫어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허, 참. 그러면 이 미친 소설들은 통제를 하면서 썼다는 거 아닙니까?


“또라이처럼 보이려고 소설을 썼는데, 평범하다는 얘기 들으면 좀 상처받겠죠. 그렇지 않을까? 나는 ‘와 이거 되게 재밌지 않아, 또라이같지 않아?’ 라고 생각한 건데.”



그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dcdc님 소설이 재밌는데, 어떤 사람은 취향을 타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또라이 같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어요. 확신할 수 있어.”


누가 읽어도 또라이 같은 소설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자신을 통제해 온 여기 이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쩌다 이렇게 되셨어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처음으로 했던 질문이었다. 그의 소설 소재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내용뿐이고 소설의 진행과정도 마찬가지라서,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만 밝혀도 이건 좋은 인터뷰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질문을 맞닥뜨리자 그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러게, 너무 큰 질문이었던 것 같아서 부연설명을 하려고 한 것이,


“이런 소재를 쓸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큰 의미에서는 있을 수 있는 소재들이죠. 소설이라는 게 본질적으로는 사소한 것들에 착목하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소설이 너무…… 수치를 몰라요.”


“아, 그건 성격이 그래요. 전 원래 수치를 몰라요. 제가 얼마 전에 별자리 점을 봤는데.”


“나도 염소자린데 난 안 그래요.”


“……점 쳐준 사람이 나보고 똘끼 있는 여자랑 연애할 거라고 했어.”


“그건 점 안 봐도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



그의 유년시절에 뭔가 엄청난 충격이라도 있었던 건 아닐까 한참을 캐내어 보았지만 도통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오히려 유년시절부터 자꾸 또라이 같은 행동을 했다는 고백 정도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사실 맥주를 마시는 내 앞에 앉아서 컵케이크를 먹는 이 남자는 전혀 또라이 같아 보이지 않는다. 셔츠를 입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매우 순하고 얌전한 인상이다. 나는 책을 후루룩 넘겨보았다.


대통령 항문이 똥을 안 싸고 말을 하는 이야기, 뽁뽁이 속의 외계문명이 인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야기, 지구를 음모(陰毛)가 뒤덮는 이야기, 세상 모든 것들이 게임 괴혼(남코의 플레이스테이션용 액션 게임. 주변의 물건들을 ‘덩어리’에 붙여서 크게 만드는 게임이다.)

의 덩어리처럼 하나로 합쳐지는 이야기, 김꽃비가 일천만 명이 되어서 우주로 날아가는 이야기, 화장실에 몇 날 며칠 동안 갇히는 이야기, 얼굴이 좆이 되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그는 입술을 삐죽거리거나 헤실헤실 웃는다. 나는 얼마 전 그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티셔츠를 거금 7천 원을 주고 구매했는데, 캐리커쳐 속의 그는 아기사슴으로 묘사되어 있다. 워낙에 여리고 곱게 생긴 인상이라 그의 주변에는 ‘아기사슴보호위원회’라는 위원회가 활동하고 있을 지경이다(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그 위원회의 일원이다)!


그리고 책을 들여다보는데,


아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되셨어요.







정치적인 작가


그는 생각보다 상당히 정치한(!) 소설들을 많이 쓰는 작가다. 일단 표제조차도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가 아닌가. 많은 경우 정치소설이란 리얼리즘에 기반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방현석이나 황석영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혹은 세계관을 통해 흥미로운 비유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려 볼 수 있겠다. 그러나 dcdc의 경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정치한 소설을 쓰는 작가치고는, 그의 소설은 메타포가 메타포라고 할 것도 없이 간명한 경우가 많다. 굳이 어렵게 몇 겹씩 장치를 만들어서 정치성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현실에 대한 비유를 흐리지도 않는다. 그것이 세련된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왜 멀쩡한 항문은 냅두고 입으로 똥을 싸느냐? 이는 항문에 대한 사보타지다.”

“항문이 똥을 싸는 존재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입은 다르다. 입이 밥을 먹거나 물을 마시기도 하는 데 쓰는 존재라서만은 아니다. 입은 말을 하는 곳이다. 말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서 자리 잡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를 의도적으로 방기했다. 그가 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 똥이다. 앞뒤가 맞고 모순이 없어야 말인데 대통령은 그렇지가 않다. 그런 말은 말이 아니라 똥이다.”

“그렇다. 대통령은 입으로 똥을 싼다.”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중


비유는 비유라고 할 것도 없이 단순하고 언어는 그대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상황이 너무도 아연한 것이라 읽는 사람은 웃을 수밖에 없다. 도무지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고, 상상하는 것조차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 소설이란 ‘있을 법한 일’을 쓰는 것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이 경우에는 도무지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새어나오는 웃음이다. 도무지 현실이 될 수 없을 것 같이 ‘웃기는’ 이야기들이 이 소설집 속에 있다.



“제가 2007년에 열심히 운동권으로서 참여를 했었어요. 그 다음에 조직 안에서 싸우고서 뛰쳐나왔죠.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2008년 촛불집회 때는 나름의 방식으로 도우면서 열심히 나갔어요.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운동권을 그만뒀던 게. 요즘도 6개월에 한 번 정도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아요. 그때 저랑 싸웠던 사람들이 나와서 ‘너는 비겁한 애일 뿐’이라고 욕하고, 저는 ‘나는 나대로 이런 걸 하고 있을 뿐’이라고 반론을 하고. 콤플렉스가 있는 거죠.”


운동이든 무엇이든 무언가 영향력을 미치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조직’의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조직은 개인과 다른 조직 내부의 논리가 결국엔 발생하게 마련이다.


“너희들처럼 이렇게 조직에 함몰되어서 주변 사람들 보지 않고 깽판을 치느니, 나는 내 주변 사람들 챙기면서도 어떻게든 해 낼 거야.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쨌든 그는 지금 ‘조직 운동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글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을 바꾸는 작업을 해 보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의 글은 분명 어느 방향으로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 보였다.


“북개는 왜 그러오? 그대 사제들이 희망승합차希望乘合車를 준비하여도 돕지 않고 저잣거리에 리불만 남기고 앉았으니.”

……원 별호가 북개였는데 그 뜻은 바로 북한산 개새끼를 줄여 부름이라. 이 치는 반자복공反資復共을 주창하는 결사에 소속된 인물로 운동권의 고수로 널리 알려졌다. 운동권은 비결을 통한 수련만큼이나 실전을 통한 무공 연마를 중시하는데 북개도 한때는 곳곳의 항전에 사수대死守隊로 참가하여 그 명망을 드높인바 있었으니. 그러나 이제는 지쳤는가 사제되는 신진고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가타부타 잔소리만 해댔다.

― 「사조백수전」중


그는 개인을 향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빈정댐일 때도 있고 좌절일 때도 있고 다정함일 때도 있겠으나. 정치적인 문학을 한다는 것은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정치적인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의 인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침몰하는 배 위에 있을 때 우리는 그 배의 상황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작가란 그 배 안에서 아우성치는 인간들을 바라본다.


노골적인 비유 속에서도 그가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는 것이 상황보다는 사람이라는 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그는 좀비를 연상시키는 소설들을 많이 쓴다. 「일천만 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가 그렇고. 「돼지 좀비 바이러스」는 노골적으로 좀비에 대한 이야기이며, 「201X 뽁뽁이 대량학살사건에 대한 보고서」는 비슷하게 복제되는 수많은 생명들이라는 맥락에서 여전히 좀비를 연상시킨다. 「마이클 잭슨 사랑해요 고마워요」에서는 마이클 잭슨까지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좀비물은 전형적으로 정치적인 소재다. 처음 좀비물이 등장했을 때도 정치적 해석이 쉽사리 적용될 수 있었고, 아직까지도 대중·노동계급·우민을 대표하는 환상적 이미지로 활용된다. 다만 dcdc의 경우는 전형성과 일반성을 추출하기에 상당히 어려움이 따른다. 이들은 인간을 공격하지도 않고 인간과 연대하지도 않고 대체로는 어처구니없이 거대해지고 만다.


“dcdc님 소설에서 보면 자꾸 어처구니없는 결말을 내잖아요. 괴혼처럼 한 덩어리로 합쳐진다거나(「하나가 둘이다」), 방사능의 충격으로 거대 괴수가 된다거나(「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그런 것들 나오잖아요. 여러 개체들이 합쳐져서 거대해지거나 그런 상상력.”


인간에 집중하는 이 작가는 대중의 힘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민한 지점을 그런 상상력 속에서 포착해 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생각이 과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가님은,




연애를 못 해서 그래 : 어린아이의 문학


“그쵸, 그게 내가 다 연애를 못 해서 그래.”


“응? 무슨 말이예요?”


“다 연애하고 싶어서 연애하려고 찌질대다가 망하는 애들이잖아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가 발생하였다. 연애를 못 해서라니!


“제가 좀비물을 많이 쓰잖아요. 「마이클 잭슨 고마워요 사랑해요」도 좀비를 염두에 두고 썼고, 「일천만 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도 좀비물이고. 그게 다 섹스의 좌절이에요.”


WTF?


“난 되게 노골적인 암시라고 생각했는데?”




아, 그렇구나. 섹스를 할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단순히 쾌감이 아니다. 타자와 내가 그 순간에는 하나가 되어 있다는 환각 같은 것이 오히려 쾌감보다 훨씬 중요하다. 쾌감은 부산물로 딸려오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이를테면 환각이자 망상이겠으나, 그런 환각조차 좌절된 사람에게는..


“망상이 굴절되는 거죠.”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른이 되지 않는다. 모든 소설이 성장소설이라는 말은 그의 소설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하나가 둘이다」의 경우 어딜 봐도 동화의 생김새를 취하고 있는데도 주인공인 ‘하나’는 성장하기는커녕 자신의 굴절된 욕망에 패배해서 세계를 집어삼키는 퇴행적 선택을 한다. 좀 더 유쾌하지만 「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같은 경우에는 삼촌인 홍정남이 그다지 어른이 된 거 같지는 않아요. 그냥 계속 그대로 만족하면서 끝나버렸어. 서울 시민도 다 없어졌는데.”


“그쵸, 다 어른이 못 되고 좌절해서. 연애를 못 한 게 커.”


“아기사슴보호위원회 계 부을까요.”


“계?”


“러브플러스. (코나미에서 제작한 닌텐도용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다. 일반적인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은 주인공과 연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데에 비해서 연인이 되고 나서의 일반적인 일상이 계속되는 구성이다.)


“……사 주세요.”



「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는 특히나 매력적인 소설이다. 심지어 김보영 작가는 추천사에서 ‘조금 더 활기와 생명력이 넘쳐나고 약간 더 능청스럽고 정열적이고 집요하다’ 라고 묘사한다. 김보영 작가는 이것을 ‘사랑의 힘’이라고 말했지만, dcdc 자신은 ‘연애 부재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집 내부에는 노골적으로 dcdc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들이 왕왕 등장하는데, 「김꽃비가 세종로를 정복했을 때」의 두 주인공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연애에 대한’, 혹은 ‘인간 이해에 대한 욕망이 좌절된’ 삼촌 홍정남과 그런 삼촌을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는 냉소적인 조카. 통제를 잘 하는 작가 dcdc는 자신의 좌절된 욕망조차도 완벽하게 통제해서 글 속에 옮겨두었다.


“김꽃비는 그런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연애를 하고 싶은데 결국 못 하잖아요. 삼촌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면서 영화를 만들잖아요. 그냥 실연하는 사람의 일련의 과정인 것 같아요. 고백하고, 차이고,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그게 이 책 전체 같아요.”


“「하나가 둘이다」는 난 정말 불쾌했어.”


“나는 동화를 쓰려고 했는데. 『몽실언니』같은 것보다는 내 소설이 더 건전하지 않아?”


“『몽실언니』는 우울해도 카타르시스가 있는데, 「하나가 둘이다」는 배출구가 하나도 없잖아. 오히려 응어리가 생겨요…….”


“나는 원래 결말을 바꾸려고 했어요. 조금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잘 안 되더라고…….”


“우리는 하나가 아니구나.

두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아무 대꾸없이 두리를 안아줬다. 두리의 땀에서는 아몬드 냄새가 난다. 달착지근하면서도 힘찬 냄새. 나도 이랬던 날이 있었을까. 두리의 머리에 코를 박았다. 두리도 나를 꼭 껴안는다. 두리를 감싸 안는다. 아메바가 먹이를 식포로 감싸듯이, 위족으로 미생물을 감싸듯이. 식세포 운동으로 아메바와 먹이가 하나가 되듯이.

“두리야. 하나가 되자.”

두리가 끈적하게 녹아 붙는다. 먹다 뱉은 엿가락처럼 그렇게 하나가 된다. 아빠와 엄마는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비명을 지른다. 

―「하나가 둘이다」중


……이혼을 대비해서 애 이름을 하나라고 지어선 안 될 것 같다. 


어른이 되기는커녕 하나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퇴행한다. ‘아메바’ ‘미생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며 작가는 퇴행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문장에 드러내 주었다. 일반적인 의미의 카타르시스는 이 소설 내부에서 찾을 수 없다. 어른이 되기를 포기하거나 완전히 좌절된 자의 절망, 그리고 그 절망이 단순히 절망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냉소를 통해 ‘웃픈’ 유머로 끌어올려진다. 문제는 ‘웃픈’ 게 너무 웃기다는 거다.




냉소적이고 뻔뻔하지만 스마트하고 착한 남자의 소설을 성장시켜 줄 여성분 구합니다



“A라는 인물이 있고, B라는 인물이 있고, A와 B 사이에 C가 있을 때 어떤 갈등상황이 벌어지고…… 보통은 이런 식으로 소설을 구상하잖아요. 전 그걸 못 하는 것 같아요. 대신 굉장히 웃긴 상상을 하나 해요. 대통령의 항문이 어느 날 말을 하기 시작했어.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일어날 거라고 예상되는 장면들을 다 정리를 해 놓아요. 그리고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배치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해요.”


어라.


“그런 거치고는 인물들 사이에 디테일이 너무 좋은데.”


분명 이 소설들은 미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개연은 매우 탄탄하다. 놀라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잔머리가 좋은 것 같아요.”


대통령 항문이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서울시민이 모두 김꽃비로 변하는 것도, 얼굴이 좆으로 변하는 것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는 것은 디테일의 힘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이야기의 짜임새가 훌륭하면 읽는 사람은 그 이야기를 신뢰하고야 만다. 이입하고 따라 들어간다. 이 꼼꼼하고 머리 좋은 작가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홍정남은, 홍은 제 성에서 따 왔고. 정남은…… 김정남.”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동정남.”


“뭐?”


“오타쿠인 독재자 같은 느낌으로.”


이것 뿐만이 아니다.


“「안에 사람 있어요」는 앞에 붙은 숫자가 이 사람이 의식을 잃었던 횟수예요. 그래서 그 숫자가 심하게 널뛰기를 해요. 가운데를 생략했다기보다는 이야기의 템포조절? 다운로드 받을 때 뜨는 퍼센테이지같은 감각을 주려고 했어요.”


“「돼지 좀비 바이러스」는 반전을 배치하려고 이야기를 거꾸로 썼어요.”



「사조백수전」은 내가 본 패러디 소설 중 손에 꼽을만큼 계산이 잘 되어 있는 소설이었다. 동사서독남제북개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나타나는 왕중양까지! 진숙 대협, 화우낭자, 폭풍설사, 수타 등의 단어들도 어쩌면 저렇게 적절하게 한자를 매치했을까 감탄을 금치 못했다.


 dcdc의 작품 쓰는 스타일이란 흥이 아니라 논리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그럴 수 없이 논리적으로 써 내려간 것이다. 뻔뻔하기 그지없다.우뇌형 인간인 나는 그저 감탄하며 섬세한 계산들을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뭐 하나도 그냥 배치해 놓은 게 없었다.





차기작에 대해서 묻자 또 미친 대답이 돌아왔다.


코스믹 호러라고 하잖아요. 우주적인 존재가 공포스럽게 지배하는 거. 그걸 바꿔서 코스믹 에로스를 쓸 거예요. 거대한 아메바 생명체가 이웃 항성을 감싸 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섹스고 별을 잉태하는 과정인 거야.”


우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자 그는 


“제 소설은 안 보셔도 김꽃비 배우님의 영화는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독자는 책을 산 사람들이예요.”


“아, 그렇구나. 그럼 제 소설도 사셨으니까 김꽃비 배우님의 영화를 보시면 작품을 더 잘 이해하시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꼭 추천합니다.”




사실 나는 이 인터뷰를 쓰면서 그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연애할만한 사람이라는 공개 추천장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다 쓰고 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인터뷰 중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를 옮겨둔다.


“나 나름으로 내면 고백을 하는 거예요. 연애 못 하니까 이런 소설 썼다고. 엄청난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고백이야. 별자리 점을 보러 갔는데 연애운이 되게 나쁘대. 그냥 원래 나쁘대. 난 연애해도 잘 안 될 거고 원래 잘 안 되고 해도 재미없을 거래.”


풀이 죽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밝은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대신 부인운이, 부인운이 좋대! ……그것만이 희망이야.”


“너무 점을 신뢰하지 마. 왜 지금 미신 유물론자가 되어 있죠?”


“왜냐면요, 내 인생에 있어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해 주는 사람은 걔네밖에 없어…….”


“아까 내가 디테일이 좋다 그랬잖아요. 내가 보기엔 소설에서 디테일이 훌륭하다는 건 그 작가가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를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내가 보기엔 dcdc님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훌륭해요. 그런 사람은 연애를 잘 할 수 있어요.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 성장하지 못한 자신을 사랑하고 성장하지 못한 당신들도 사랑하는 주인공, 그리고 조금씩 문을 열어보려고 애를 쓰는 주인공들이 이 소설에는 있다. 그는 아마 연애도 잘 할 거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추천하는 김꽃비의 베스트 영화 《삼거리 극장》이나 보면서 그의 성장을 기다리면 될 듯하다. 일단은 이 재미있고 또라이 같은데다가 너무 사랑스러운 한 권의 책을 옆에 두고서.



당정서위제하작             - 김보영 편




0. 들어가며

 부동산 대란이라는 소란이 서울이라는 조막만한 땅덩어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지라. 글쟁이들 지면이라는 공간도 해가 지날수록 좁아지고 구하기 어려워지고만 있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곳, 온우주 소식지라는 지면을 분양받게 되었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도 이 귀하고도 귀한 지면에서 무슨 사업을 벌여야 이문이 남을지가 또 고민이 되었다.


  원래 나야 블로그라는 공간에서 놀던 가락이 있으니 하던 대로 영화평을 쓰거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상징이나 이미지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을 하거나 할까 이것저것 안을 짜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귀한 지면을 얻은 만큼, 카페베네나 롯데리아처럼 흔한 장삿속으로는 영 재미가 없겠고. 기왕 온우주 소식지라는 부동산에 자리를 잡은바 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자고. 더 융성한 지역 문화를 창출해보자고 쓸데없이 포부를 넓게 잡기로 했다.


  그래서 준비한 기획이 바로 이 당정서위제하작이다. 어렵게 써놓긴 했지만 뭐 별 의미는 없다. 그저 당신이 정상에 서기 위해서 제거해야 하는 작가들의 약자일 뿐이다.


  한국에는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많고 좋은 글을 읽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다. 그러니 좋은 글에 대한 글을 써보면 나름 수지타산이 맞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좋은 글에 대한 글은 좋은 글의 수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이고 뭣보다 좋은 글에 대한 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글의 형식에 대해서도 이모저모 고민을 해보았다. 작가 개인에 대한 열전을 쓰기에는 아직 자료가 많지 않고, 작품 하나에 대한 비평을 쓰기에는 써야 할 글이 너무 많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은 내가 정상에 서기 위해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작가들의 리스트를 만드는 동시에, 이 작가들의 작품군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과 매력을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리스트의 첫 시작은. 당신이 정상에 서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첫 작가는 바로 김보영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달리 또 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1. 거울

  김보영은 거울의 작가다. 독자로 하여금 어떤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 정확히는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글자를 읽고 있는 당신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 보게 만드는 작가다. 김보영의 소설은 그렇게 책을 펼친 순간 비현실의 공간으로 빠져들기를 기대했던 독자들을 무참히 혹은 태연스레 배신한다.



  김보영이 SF작가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행성이나 현재 이 시간과는 분명 다른 시대의 배경이 주어질 때가 많다.

  하지만 독자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시공간이 지금 이곳의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님에도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이제까지 자신이 읽은 이야기가 모두 거울처럼 나 자신을 반사하고 비추기 위해서 마련된 공감이었음을 깨닫는 일종의 발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발견의 순간 독자들은 작가의 무심한 배신을 사랑하게 된다.



  『멀리 가는 이야기』에 수록된 「다섯 번째 감각」은 김보영 특유의 배신이 잘 드러난다. 가난한 주인공 연주는 얼마 전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언니는 그녀와는 달리 여러 면에서 감이 뛰어났으며 항상 야근을 한다며 늦게 귀가한 것 외에는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경찰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언니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었다며 추궁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스릴러 장르의 도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김보영은 언제나 이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사이비 종교 집단에 빠져 있었다고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뭘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죽기 전에 언니가 주문이라도 외우더라는 말인가요?」

  「입을 움직였습니다.」

  「입을 움직여요?」

  나는 그만 팔을 크게 움직이고 말았다.

  「누구나 입은 움직이잖아요? 밥을 먹을 때도, 숨을 쉴 때도 입은 움직여요!」

  「특이하고 규칙성 있게 움직입니다. 그들은 입을 사용해서 어떤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요.」 

- 김보영, 「다섯 번째 감각」, 『멀리 가는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2010, p.76.



  경찰과 연주와의 대화는 어딘가 어색하다. 인용하지 못한 소설에서의 묘사나 시점에서도 불분명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경찰은 언니가 주문을 외웠기라도 했냐는 연주의 질문에 생뚱맞게도 입을 움직였다고 대답하고 연주는 소리를 크게 외치지 않고 팔을 크게 움직이며 놀란다. 경찰이 묘사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적인 행동은 입을 규칙에 맞추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독자들은 그제야 제목의 의미를. 인물의 대사가 “”이 아닌 「」 안에 들어있는 이유를. 그리고 이제껏 느꼈던 위화감을 짐작하게 된다. 다섯 번째 감각. 말하고 노래하는 것을 듣는 감각. 청각이 배제된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음을 말이다.

  작품의 초반부터 반전이 밝혀지기에 스포일러를 하더라도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을 작품인 「다섯 번째 감각」의 소재만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류의 반전은 김보영의 소설에 필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이 반전은 과학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기존의 추리물이나 SF에서 다루어지는 소재와는 궤를 달리한다.

  「다섯 번째 감각」에서 반전으로 다루어진 소재인 청각은 일상적으로 느끼는 오감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혹은 박탈된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일상을 다시 되짚어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의 재배치는 김보영만의 색깔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특별하다.



  현실을 달리 보게 만드는 ‘낯설게 하기’의 기법은 문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하지만 김보영은 이 기능을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실천한다. 김보영의 반전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가능성의 제시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육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가능하게 만들어온 전제가 지워진 세상을 통하여 우리가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잊고 있던 오감을 일깨우는 방식의 반전이다.


  그렇기에 김보영의 SF에 나오는 과학개념들은 「진화신화」나 「촉각의 경험」에서와 같이 전문적인 첨단과학기술이 아닌 일반적이고 친숙한 교과목 영역 안에 있음에도, 그 어떤 SF 작품보다도 더 미래적인 체험을 가능케 해준다. 



  김보영을 거울의 작가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엄밀히 말해 거울은 좌우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앞뒤가 바뀌는 것이다. 당신이 거울 앞으로 다가가면 당신의 거울상은 커진다. 당신이 앞으로 간만큼 거울상은 뒤로 와 가까워진 것이다. 당신이 거울 앞에서 물러나면 또 반대로 거울상은 작아진다. 당신이 물러난 만큼 앞으로가 멀어진 것이다. 


  김보영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색다른 이야기가 익숙한 모습으로 바뀐다. 일상에서 일그러진 부분을 찾아내는 일반적인 반전과는 달리 앞뒤를 바꾸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고 마주 보게 만든다.

  눈에 불을 밝히고 낯선 무언가를 뒤지는 태도가 아닌 태연스레 시야의 주체를 바꿈으로써 나 자신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시점에서 비춰지는 익숙한 본인의 얼굴은 작가의 깊은 공감능력과 타자에 대한 애정 어린 태도에 힘입어 제법 잘생겨 보인다.



  그러므로 애초에 중요한 것은 반전 자체가 아니다. 스포일러를 기피하는 사람들을 위해 김보영 작품군에 등장하는 반전을 일일이 언급을 하지는 않았으나 반전에 대해서 미리 듣고 읽더라도 경이를 느낄 수밖에 없음은 분명하다.

  로봇과 유기 생명체의 관계가 도치된 「종의 기원」이나 히말라야 등정을 하듯이 지하를 파고 내려가는 「땅 밑에」나 김보영의 반전은 카타르시스의 폭발이 아닌 아드레날린의 폭주를 부추기는 방식으로 글의 호흡을 이끌어나간다. 이미 미리 알고 모르고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고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라는 식의, 작품 내내 꽁꽁 숨겨놓은 일회성의 반전이 아닌 - 김상훈이 논리적 성실함(「논리와 고적(孤寂)한 환상의 교점에서」, 『진화신화』, 행복한책읽기, 2010, p.321.)이라 말한 바 있는 - 일관된 태도와, 마주 보는 시선 자체에서 김보영의 반전은 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2. 거울미로


  놀라운 점은 김보영의 실험이 - 혹은 실험이라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내재화된 저 태도가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울 자체였던 김보영의 소설은 거울을 작품 안의 인물이자 소재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함으로써 거울 안의 거울, 거울을 품은 거울이 된다.



  아예 제목부터 거울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거울애」에서는 가상의 증상인 ‘자기대상분리장애’를 겪는 여성 소희가 등장한다. 이 자기대상분리장애는 몹시도 예민한 인물이 타자의 감정과 생각을 읽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자신과 타자를 분리하지 못하는 증상이다. 소희의 주변 인물들은 그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매료되어 나르시시즘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를 독차지하려 애쓴다.



  「거울애」에서 제시된 거울과 주체의 관계는 「몽중몽」과 「스크립터」에 이르러서 인물과 인물만이 아닌 작품 구조의 문제로 확장된다. 「몽중몽」은 제목 그대로 꿈과 꿈이 연쇄되는 내용이고 「스크립터」는 가상현실온라인게임에 유일하게 남은 플레이어와 이 게임 서비스를 종료하려는 운영자 사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스크립터」의 플레이어는 롤플레잉에 광신적일 정도로 천착하는 사람이기에 운영자는 플레이어와 대화를 하기 위해 천사의 형태를 빌리기도 하고 게임 세계관 설정을 배워 스스로 롤플레잉을 하려 하기도 한다. 이 우스꽝스럽고 즐거운 소품으로 보이는 이야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명 플레이어로 등록되지 않았으나 인공지능 NPC로도 보이지 않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앞과 뒤를 분간할 수 없는 미스테리극으로 전환된다.

  이 모든 등장인물들 모두 살아있는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받는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임을 설득하려 애쓰지만 이에 대한 증명을 이루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거울 두 개를 서로 마주 대었을 때 그 안의 거울상이 무한히 펼쳐지는 것처럼 의심과 의심은 끝없이 이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NPC일지 모르는 플레이어와 게임일지 모르는 현실 그리고 신이나 다름없는 운영진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된다. 


  기존의 작품이 현실을 깨우치는 반전으로써 독자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면 「스크립터」의 구조는 하나의 진실을 찾기보다는 여러 거짓 속에서 있다고 믿었던 현실을 의심하고 가늠할 수밖에 없는, 모든 벽이 거울로 이루어진 미로인 것이다. 



  이러한 거울미로의 구조는 2013년 출간된 김보영의 첫 장편 『7인의 집행관』에서 정수에 이른다. 이 소설의 주인공 흑영은 그의 형이자 주군인 왕을 시해한 죄로 여섯 개의 세계에서 여섯 번의 사형을 선고받는다. 흑영에게 원한이 있는 6명의 집행관은 각자 그를 죽이고 싶은 방법을 골라 도시문명의 조직폭력배나 옛 제국의 검투사, 신화 속의 존재 등으로 흑영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 다시 죽이려 한다. 

  하지만 세계를 주무를 수 있는 권능에도 불구하고 집행관들은 흑영의 도발과 폭로에 뒤흔들리며 올바른 집행을 수행하지 못하고 만다. 집행관이 만들어낸 세계는 집행관의 욕망이 투사된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흑영은 그 욕망을 가지고 놀 듯 집행관을 희롱하고 훼방한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 가장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우리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 김보영, 『7인의 집행관』, 폴라북스, 2013, p.359.


  이야기가 진행되며 집행관은, 또 흑영은, 왕 시해 사건의 전모에 조금씩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이 전모는 어디까지나 가상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실 세계에 대한 어설픈 재현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자 기억마저 잃어버린 흑영의 입을 통해서만 나온다. 그리고 그 흑영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주는 집행관들 역시 완전한 평면의 거울이 아닌 왜곡되거나 부서진 거울로서 흑영을 비출 뿐이다.


  “왕비님, 우리 중에 자신의 모습으로 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암공이 언제부터 저리 왜소하셨으며, 양명왕께서는 왜 아직도 다리를 쓰지 못하십니까? 수경도 몰라볼 정도로 번듯해졌더군요.”

“.......”

“이것은 제 자아상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보는 모습은 실제와 다르고 남이 보는 모습과도 다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더러 다른 모습을 하거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하시면 그리 간단히 할 수 없습니다.” 


- 위의 책, p.290.



  김보영이 거울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순간 책 안에 기술된 모든 문장은 불신의 대상이 된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실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도 몰랐던 욕망에 미혹되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재주란 없다. 기존의 김보영 작품에서 거울로서의 역할이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재규정하기 위함이었다면 『7인의 집행관』을 비롯한 작품군은 거울미로로써, 내가 나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의문과 공백만을 남기기 위해 작동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남는 이 텅 빈 무엇이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임을. 그리고 김보영의 소설이 점점 더 맑고 날카롭게 우리의 얼굴을 비출 수 있도록 닦여지고 있음을 말이다.





  김보영의 작품에는 흔히 해외에 번역되어 출간되더라도 반드시 인정을 받으리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이는 역시 앞서 서술한 바처럼 이 작가가 독자적인 구조와 탄탄한 서사라는 기본기 두 가지를 고루 갖춤에서부터 나오는 신뢰 덕분일 것이다. 그렇기에 김보영을 당정서위제하작. 당신이 정상에 서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작가의 첫 번째 리스트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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