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가장 뒤처진 걸음까지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단편 수록 순서는 어떻게 정한 건가요? 「악어의 맛」이 표제작인 이유도 궁금한데요.

주로 편집장님이 정하셨어요. 「밥줄을 지켜라」가 가장 읽기 쉬워서 맨 앞에 들어갔어요. 반대로 「너의 낡은 캐주얼화」나 「노병들」은 한국의 현실이 많이 반영된 이야기라 뒤에서 같이 묶였고요. 「악어의 맛」은 제일 우화적이고 상징적이라 나머지를 포괄할 법해서 표제작이에요. 「로보를 위하여」는 심각한 부분은 덜어낸 이야기라서 쉬어가는 의미로 중간에. 부록 만화는 그리신 분이 더 줄이면서 훈훈한 하이틴 로맨스로 만들어주셨어요.


화자도 거의 여자이고,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상황이 많이 나오잖아요. ‘여성’이라는 게 중요한 주제인가요?

의도하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어요. 전 제가 여성이라는 걸 많이 의식하는 여성이에요. 그래서 소설을 쓸 때도 그게 기본적으로 큰 줄기를 차지하는 것 같아요.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데요. 그보다는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그런 강박, 모두가 공감할 만한 출발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사회주의죠. 전 마르크스의 위대한 점이 그거라고 생각해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단 거. 이 소설에서 분명하게 사회주의라고 할 건 별로 없어요. 말하자면 노동운동이죠. 저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활동가와 예술가의 역할은 달라요. 활동가로 있으려면 대중보다 앞장서려는 의지가 필요하죠. 그와 달리 예술가는 가장 뒤처진 걸음까지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세계가 모순 덩어리라면, 그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고요. 어차피 현실을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저는 계급투쟁 이야기를 다루고 싶고, 그게 제가 직시하는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전 제가 자리한 현실에 대해, 굉장히 뒤처진 걸음, 보기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 말하기 어려운 것까지 통틀어 바라보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그리고 그게 문학이 혁명의 전장에 뛰어드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념을 담은 소설에는 계몽주의가 묻어나잖아요. 그런 느낌은 안 나거든요.

그렇다면 저에겐 매우 기쁜 일이에요. 제 소설이 다른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소설을 쓴다는 건 사회를 반영하는 작업인 거고, 어떤 정치적 지향을 갖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통찰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저는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예술이잖아요.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아도 그 과정에는 공감할 수 있죠. 그런 부분이 제 소설에 있으면 좋겠어요.


사회를 표현하고 싶다면 꼭 장르문학을 쓸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도 장르적 요소들이 들어가서 개성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노병들」은 능력자들이 나오긴 하지만 보통의 슈퍼히어로물과는 다른 재미를 취하고요. 말하자면 ‘<어벤저스>의 60년 후’?

이건 제가 계산해서 쓰는 건 아니고, 취향인 것 같아요. 장르를 좋아하는 거죠. 장르의 문법이나 분위기도 좋지만 무엇보다 장르적 서사에 매력을 느껴요.


이 소설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는지. 그리고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일단은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어요.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재미라고 생각해요. 팸플릿도 아니고 교과서도 아니잖아요. 재미있어야죠. 그리고 어쨌든 저는 세상의 모순을 잘 반영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전 세상이 그렇게 희망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보단 모순투성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전체적으로 보면 악화되는 부분도 품고 있죠. 동시에 굉장히 나쁠 때조차도 좋아질 가능성을 품고 있고요. 전 그 모순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방법을 고민하고 싶어요. 이면의 일그러진 부분들을 지켜볼 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키난

책과 밥을 주면 글을 씁니다. 고료도 좋아합니다 .

거울에서 기사필진으로 주로 인터뷰 담당, SF도서관에서 행사와 판매 담당.

현재는 평화로운 일개 취업자를 간절히 지망.

장래희망은 안락의자 탐정 타입의 할머니.

세상에 공짜는 없다


 90년대 이후 한국 SF 시장의 역사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하여 중도에 멈추거나 포기한 SF 시리즈 또는 선집들의 잔해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형식, 즉 출판사가 어떤 책을 내고 그 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구입하는 식으로는 출판사가 수익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은 확인된 지 오래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잠시 죽은 자식의 고환을 만지는 일을 그만두고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자. 그쪽이 더 보기 좋아서는 아니다. SF 팬덤의 머릿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이미 지나온 길들이 그러했듯, 눈앞에 펼쳐진 땅들도 거진 황무지로 이루어져 있다.

 취미에다가 어떤 비장함을 부여하기는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고, 실제로 누구도 이 황무지를 걸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과 좀 더 긴 미래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당신은 SF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미래로 향해 보자. 시장의 크기가 좀처럼 확장되지 않는 SF의 출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업계는 몇 가지의 자금 조달 실험을 진행 중에 있다. 바로 독자들이 참여하는 실험 말이다. 글의 분량 상 크게 출판사 펀드와 그 외 펀드로 나누어 언급하겠다. 이번 회는 출판사 펀드다.


 출판사 펀드의 대표적인 사례는 언론에도 수차례 언급된 북스피어 출판사다. 북스피어의 경우 펀드 금액을 프로모션에 투자하는데, 이때 프로모션 대상 도서는 미리 정해져 있다. 따라서 북스피어 펀드는 어떤 책을 출간하기 위한 펀드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책이라도 내 보자’라는 방어적인 발상을 넘어 ‘제대로 한 번 띄워볼 테니 자본을 모아보자’는 원기옥스러운 아이디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펀드에 참여하는 독자들 중에 가시적인 수익을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산술적으로 보면 이 펀드는 러닝 개런티 형식을 빌린 일종의 (사실상 금리 제로의) 저리 대출이다. 확률 대비 이율로 따지면 정말로 의미 있는 수준의 이율을 달성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참여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펀드에 투자할 때의 담보 또는 기대수익은 무엇일까? 우정과 재미다. ‘우리’가 같이 가자는, 으쌰으쌰 하자는, 비밀기지에서 모의작당을 펼치는 흥겨움이다. 북스피어는 수 년 동안 독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장르 팬덤의 일부를 출판 시스템 안으로 서서히 편입(독자들이 물류작업까지 함께 하는 출판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시켰고, 펀드는 그 ‘시스템화하는 팬덤’의 최종 형태 중 하나로 등장했다. 이 펀드를 통해 독자는 생산과 유통이 완료된 뒤에야 비로소 등장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제작 및 유통 과정에 미리 또는 이미 작용하는 비금융적인 자본-동력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무척 유리한 자금 운용이며, 독자들(팬들)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게임이다. 북스피어는 기존의 업계 상식대로라면 대출 또는 자본 잠식을 일정 확률로 각오해야 할 대규모 프로모션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우정을 담보 삼아 큰 리스크 없이 실현시킬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출판사의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모습은 다른 문화 업계를 통틀어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무적인 사례다. 장르 팬덤의 머릿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지만, 북스피어는 이들이 <300>에 나오는 스파르타 정예 용사들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물론 북스피어의 모델을 바로 따라갈 수 있는 출판사는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는 소통을 바탕으로 한 신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북스피어라는 ‘출판사에 대한 팬덤’이 장르 팬덤 일반의 결집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유사한 경우는 있다. 장르 전반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행복한책읽기(이하 행책) 펀드다.

 행책 펀드의 경우는 북스피어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선 출판사에 대한 신뢰로 모은 펀드가 아니었다. 현재 행책의 SF 출간은 대단히 저조하다. 기존의 신뢰는 이미 많이 잠식당한 상황이다. 행책 펀드는 그래도 지금까지 SF를 많이 출간해왔다는 출판사 자신의 정체성을 밑천 삼아 ‘앞으로도 어쨌든 출판을 이어가겠다’는 불분명한 공약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애당초 출판사의 존망 여부가 펀드의 목적이라고 볼 정도로 방어적인 펀드였다. 적극적인 부분이 있었다면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진 행책의 SF 출간 싸이클을 좀 더 올리고 싶다는 독자들 각자의 열망뿐이었다. 이 펀드에서 고무적인 점이 있다면 북스피어만큼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지 않더라도 SF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기대로 모금이 가능했다는 것 정도다. 이는 팬덤 자체의 ‘자본적’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계기였고, 모금 금액으로 보는 측정 결과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펀드 자체의 결과다. 작년에 실시된 행책 1차 펀드에서 약속된 공약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2차 펀드 모금이 이루어진 것 자체도 충분히 부정적인 신호지만, 2차 펀드의 공약이 1차보다 더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즉 펀드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줄어들었다) 펀드 환급과 이익 배분의 측면 역시 후퇴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행책 2차 펀드는 공개적으로 SOS를 선언한 1차 펀드에 비해 더욱 생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말했듯 행책 펀드는 출판사 팬덤이 아니라 SF라는 장르 자체의 팬덤으로 이루어졌다. SF를 내는 ‘행책’이 아니라 ‘SF’를 내는 행책에 주어진 카드였던 것이다. 펀드의 성패는 오로지 SF 신간이 얼마나 나오느냐에 달렸다. 그러나 상황은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다. 최소한 행책 펀드가 기치로 내건 ‘연 1권 이상의 SF 출간’을 위해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중이다.

 펀드 자체는 실패할 수도 있고 때로 부실한 펀드가 존재할 수도 있다. 누군가 제안했고 다른 누군가가 기꺼이 응한 ‘신용 거래’에 대해 제삼자로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따라서 펀드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거나 기간을 짧게 잡아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프로젝트 펀딩에 대한 일반론적인 이야기는 넘어가겠다. 그러나 대단히 효율적으로 변용할 수 있는 장르소설 팬덤이라는 에너지 자원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행책 펀드가 팬덤에 피로감을 안겨주었다는 것만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유독 높은 자부심 또는 계몽의식(비교적 좋은 뜻이다)과 그에 반비례하는 시장 상황 때문에 SF 팬덤은 이미 피로한 상태다. 인터넷의 대중화 및 인터넷 서점의 활성화와 함께 SF 리뷰가 유독 활발했던 적도 있었고(최근 SF 리뷰 수가 급감한 것 역시 피로가 쌓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직지프로젝트 같은 아카이브 작업에도 도전하는 등, SF 팬들은 팬덤의 확장을 위해 가능한 방식을 나름대로 타진해왔다. 그리고 현재 그들에게 남겨진 결과물이라고는 뭘 해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더라는 결론뿐이다. 펀드는 팬들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카드패였다. 행책 펀드는 이 카드패에서 꺼내 든 첫 번째 카드였고, 결과는 현재까지는 거의 명백한 실패로 보인다. 이 카드패, 즉 펀드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뭘 해도 안 되더라는 불가능의 데이터베이스에 목록이 하나 늘어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장르에 애정을 가진 소중한 동력원들로 하여금 수동적인 소비자의 상태로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이 피로감을 어떡할 것인가? 그렇게 고개를 젓는 사람이 단 한 명일지라도, 그 단 한 명이 그때까지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왔는가 말이다. 고정 팬이 천 명이나 이천 명만 있어도 아무 프로젝트도 필요로 하지 않고 굴러갈 수 있는 이 바닥에서 한 명 두 명은 얼마나 큰가?

 행책 2차 펀드가 1차에 비해 적은 액수로 마감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남은 카드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결국 이는 한 출판사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피로도가 증가하고 있는 팬덤의 건강에 대한 문제다. 따라서 펀드에 임하는 분들은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이자 없는 대출은 없다. 비용은 어디서건 발생한다. 그리고 부실한 문화 펀드가 담보로 삼은 ‘보이지 않는 비용’이란 바로 팬덤의 생명력, 지속성, 즉 미래다. 펀드는 팬들에게 게임처럼 인식되어야 하지만, 결코 게임이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이 얼마 남지 않은 장르 펀딩의 가능성이 제대로 만개할 수 있길 바란다.


 다음 회에는 최근 화제가 된 초여명 출판사의 <던전 월드>에서 보는 클라우드 펀딩과 그 확장으로써의 장르 출판 협동 조합의 가능성, 그리고 현재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논의 중인 ‘먼저 독자들이 출간을 신청하고 여론을 모은 다음에 불특정 출판사들이 그걸 보고 가능성을 타진한 뒤 뛰어드는’ 리버스 펀드 같은 무모한(?) 시도 등을 체크할 예정이다. 다음 회까지 모쪼록 건강하시기를, 아니 SF의 종말이 올 때까지 다함께 건강하시기를 두루 기원 드린다.





최원호

어린 시절 금성출판사의 SF로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MD로 들어가서 유아 그림책부터 각종 수험서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팔아왔다.

현재는 소설과 예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on우주 홀수호에서 칼럼 "소매가로 책을 팝니다"를 연재한다.

  2011년,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처음으로 비평선 『B평』을 만들 때, 몇 차례의 회의가 진행되었다. 첫 기획 회의에서는 이 비평선의 방향이 주된 의제였다. 필진 선정부터 작품 선별 등 전체적인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제시된 아이디어 중 하나는 한 작가를 선정하고 여러 필진이 그 작가에 대한 작가론과 작품론 등을 쓰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영도’ 작가를 대상으로 한 이영도 비평선을 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여러 아이디어 중 하나였고 실제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머릿속에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과연 문학 계간지 『작가세계』나, 이문열이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상으로 여러 필진이 참여한 평론서 같은 작업이 한국 장르소설계에도 가능할 것인가?

  몇 년이 지나서도 그 아이템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필자가 비단 이영도 작가의 독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덧 국내에 판타지 소설이 자리 잡은 지 십 몇 년이 지났지만, 판타지 소설에 대한 정밀한 비평이나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그 당시에는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시점이라 무리였다고 해도, 이제는 비평서나 연구서가 등장할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SF나 추리, 무협이 다양한 이론서나 연구서, 비평서가 출간된 것에 반해 한국 판타지 소설은 잘 조명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한국 판타지 소설을 연구한다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이름은 이영도일 것이다. 신작이 출간 안 된지 몇 년이 지나도 아직까지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름. 한국 판타지 소설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으나, 막상 그에 대한 심도 깊은 비평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개별 작품에 대한 분석 및 작가론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팬들에 의해 과장된 부분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과소평가된 부분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오류만이 증식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이영도는 학계에서 어떻게 다뤄지는가? 요즘은 청소년 시절에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소설을 읽은 독자층이 대학원에 진학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영도 작가가 들어간 학위 논문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수가 많지 않지만, 한국 판타지 소설이라는 분야를 상기할 때,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 이영도가 다뤄지는 몇 안 되는 판타지 작가라는 것도 생각해볼 지점이다. 일종의 연구사 검토 식으로 몇 개의 논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7년 대중서사연구 제17호에는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안지나의 「‘판타지’ 소설의 이데올로기 연구 - 『드래곤 라자』를 중심으로」가 게재되어 있다. 이 글은 『드래곤 라자』를 중심으로 판타지 소설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2009년 한국문예비평연구 제30집에 실린 김종태·정재림의 「창작교육적 관점에서 본 판타지의 서사 방법-『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해리포터』 『드래곤 라자』를 중심으로」는 창작교육적 입장에서 판타지 서사를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드래곤 라자』는 『해리 포터』와 함께 4장에서 서사 방법에 대해 논할 때 다뤄지며, 『드래곤 라자』의 휴머니즘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온다. 같은 해, 충북대학교 교육대학원 김지연의 석사 논문 「사이버 판타지 소설의 놀이성 연구 :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중심으로」는 작품을 놀이적 서사구성으로 분석하며, 사이버 공간에서 연재된 작품의 특성을 논한다. 2011년 남서울대학교 허만욱 교수는 우리문학연구 제34집에 학술논문 「한국 판타지 장르문학의 흐름과 발전 전략 연구」를 게재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한국 판타지 장르문학을 흔히 인터넷에서 나누는 기준인 1, 2, 3세대로 나누어서 대략적인 흐름을 분석한다. 이때, 다른 글의 인용이 중심이 되지만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다. 심도 있는 주제와 대중성을 무기로 장르문학으로서는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보이며 대중에게 판타지를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평하고 있다. 2011년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혜영의  「판타지소설의 재미담론 연구」는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를 중심 텍스트로 삼은 박사논문이다. 재미에 관한 논의와 판타지에 대한 시선을 지배 담론으로 풀어냈다. 흥미롭게도 ‘눈마새 위키’나 ‘카페 드래곤라자’를 비롯한 약 10곳의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팬덤의 정보 수용과 재미 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2011년 한국교원대학교 강소향의 석사논문 「판타지소설의 문학성 연구 :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를 중심으로」는 세계관의 독창성과 내적 리얼리티, 현실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문학성을 평가하고 있다.

  한편, 작품 분석이 아니라 다른 주제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2010년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문예콘텐츠 전공 이세인의 「MMORPG의 판타지 스토리텔링 연구 : 이영도 소설 『드래곤 라자』의 게임 스토리화를 중심으로」라는 석사 논문처럼 게임과 관련된 논문들과 2007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 오혜영의 「인터넷 콘텐츠의 단행본 출판에 관한 연구 : 인터넷 소설, 블로그 연재물, 웹툰의 출판을 중심으로」라는 석사 논문처럼 인터넷 문예콘텐츠물로써 다뤄지는 경우가 꽤 있다.

  전체적으로 학계에서 이영도를 다루는 방식은 초기작인 『드래곤 라자』의 비중이 높으며, 개별 작품의 분석보다는 대중소설 또는 판타지 소설의 사회적 시선에 대한 반박적인 면이 많다. 작품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관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다른 작가들은 이름과 작품만이 언급되는 정도이며, 이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짚어보는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비평의 필요성 또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비평은 필요한가. 또 가능한가.

  비평은 작품을 평가하거나 경향을 짚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비평은 지금 그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특징을 파악하고, 가치를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작가와 독자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 판타지 소설의 미학을 알고 있을까. 한때의 흥밋거리로만 지나간다면 수면 아래로 모든 게 잠겨버릴지도 모른다. 비평이나 연구 같은 ‘담론’은 일종의 부력이다. 작품을 시간 속에 묻히게 만드는 게 아니라 계속 새로운 의미로 독자에게 다가가게 만든다. 신작에만 집중하는 시선을 돌려, 우리는 이제 한국 판타지 소설이 어디까지 왔는지 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첫걸음부터 돌아봐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전 한국 판타지 소설에 대한 비평이 더 체계적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날개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환상문학웹진 거울 필진. 날개를 펴는 곳(http://twinpix.egloos.com) 블로그 운영 중.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