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SF의 미래다


빵을 좋아해서 빵집을 차리면 행복할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특히 경제적으로 각박해져가는 이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할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빵 속에 먹고살기라는 이름의 업보가 스며들기 때문이다. 애정의 일부 또는 전부를 자본의 논리로 치환시키는 과정은 눈물처럼 쓰고 짜다. 그렇다면 책을 좋아해서 서점 MD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특히 출판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요즘은 책 MD를 뽑을 때 책에 대한 애정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특별한 애정이 없는 게 책을 팔기에는 더 좋아요. 판매량으로 냉정하게 판단하고 될 만한 아이템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소설 담당 MD, 끝내 꽃피우지 못하고 떠나보낸 걸작들을 마음 한켠의 격리실에 고지서처럼 쌓아두는 사람이다. 확실히 책을 사랑하는 MD란 좀 쓸쓸한 직업이다. 얼마 전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가 다시 나온다는 얘길 들었을 때 기쁨에 앞서 척추가 뻣뻣해진(그걸 어떻게 팔지!) SF 팬은 이 나라를 통틀어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많은 장르 중에서도 유독 잘 팔기 힘들다는 SF를 아끼는, 그래서 쓸쓸할 일이 좀 더 많은, 소설 파는 MD다.


SF가 잘 팔리는 경우는 드물다. 넘어서기 힘든 장벽이 존재한다. 대중의 취향이라는 드높고 강건한 성벽이다. 사람의 취향이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는 사실은 그 어떤 멋진 컨텐츠의 위력보다도 강고하다. ‘여러분들이 기존에 보던 것과는 좀 다른’ 작품이라고 SF를 소개하는 순간, 이미 장벽은 둘러쳐지고 게임은 어려워진다. 게다가 이 장벽은 움직이고 있다. 장벽은 점점 더 밀고 들어오는 중이다. 지금 이 사회는 어떤 책의 제목처럼 ‘피로 사회’기 때문이다.


본래 독서는 투자하는 시간에 있어 기회비용이 큰 취미다. 시간의 기회비용이 크다는 것은 곧 정신적 피로도와 직결된다. 따라서 어떤 독자를 새로운 장르로 끌어들이려면 그 독자가 이미 익숙한 분야 바깥을 향해 나가는 즐거움이 예상되는 피로를 능가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은 ‘피로 권하는 사회’다.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시간과 돈 모두에서 점점 팍팍해지는 인생들이다. 여기에 독서라는 피곤한 취미에 있어서까지 굳이 도전을 더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아니, 어느 누구도 취향을 요청할 수도 지시할 수도 없다. 그것은 권유여야 하고 또한 성공적인 권유여야 할 것이다. 그 권유가 내 일이다.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어떤 책이 출간되고 난 뒤에는 그 자신의 운명을 따라간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어떻게 도울 수는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소설 담당 MD, 그러니까 머천다이저merchandiser, 즉 세 치 혀를 가진 장사꾼. 또는 각자의 취향이라는 장벽 또는 AT필드를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고 ‘다른 세계의 걸작’들을 그 너머로 쏘아 올리는 공성 부대의 일원이다.


내가 이렇게 긴 소개 아닌 소개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소식지를 읽는 당신에게 동료로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어떤 분야의 책을 출판할 때, 일정 이상의 수준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최소한으로 기대할 수 있는 판매고가 있다. 이를 기대 판매고라고 하자. 기대 판매고는 곧 그 분야의 팬덤 규모와 직결된다. 그 분야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선제적으로 구입해줌으로써 소위 ‘밑밥’을 깔아주는 것이다. 그 기대 판매고가 손익분기점에 가까울수록 출판사들은 도전적으로 더 다양한 책을 출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SF는 그 최소한의 판매를 보장하기가 매우 어려운 소설 장르 중 하나다. 그리고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중이다. 이렇게 말하면 왜 팬덤이 초판도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작으냐, 어떻게 그걸 키울 거냐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향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 지점에서 어떤 논의건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어떤 논의나 한탄에 앞서, 동지들에게 주어져 마땅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협소한 SF 팬덤을 지금까지나마 유지해 올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신이 있어서였다. 당신은 SF 전선의 확장이라는 어려운 전투의 유일하고도 소중한 보급원이다. 뛰어난 SF 작가들과 기획자들과 번역자들이 계속적으로 출판계에서 활약할 수 있게끔, 그리고 마케터나 MD들로 하여금 ‘아직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한 권 한 권의 판매 기록이 바로 당신이 쌓아놓은 보급의 업적이다. 이 업적들이 없었다면 어떤 종류의 미래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 자체가 불확실해진다면 그에 대한 어떤 논의나 전략도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나는 때로 갑자기 등장한 걸작 SF들을 눈앞에 두고 이걸 어떻게 팔 수 있을까 고민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고민은 곧 어떻게 되기를 바라기, 즉 불확실한 미래에 대항하는 꾸준한 희망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 희망이 오로지 한 권의 책을 구입한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미 잘 알고 있다면 여기, 감사의 인사를 다시 한 번 받아주시기 바란다. 신뢰와 자랑이야말로 어제까지의 희망을 내일로 이어가기 위한 육체이기 때문이다. SF의 지속이라는 전술 활동을 위한 보급 구조는 다른 모든 좋은 것들처럼 다음과 같이 간결하고 우아하게 작동하고 있다.


희망은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최원호

어린 시절 금성출판사의 SF로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MD로 들어가서 유아 그림책부터 각종 수험서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팔아 왔다.

현재는 소설과 예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on우주 홀수호에서 칼럼 "소매가로 책을 팝니다"를 연재할 예정이다.

SF용어였던 ‘21세기’가 현실이 된 지 오래인 지금, SF 그 자체의 정체성에 어떤 변화 내지는 위기가 닥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앨빈 토플러가 40년쯤 전에 던져놓았던 말을 되새기는 것으로 출발점을 삼으면 적절할 듯하다. 그는 1975년 런던의 현대예술연구소(ICA) 강연 중에 다음과 같이 얘기한 바 있다.

“산업 사회에서는 개개인들뿐만 아니라 SF도 역시 자기정체성의 실종 위기를 맞고 있다. SF는 지금 전체 문화체계 안에서 그 스스로의 독자성을 보존해나가려면 이른바 ‘주류문학’이라고 하는 기존의 문학과 어떻게 관계설정을 해야 할지 곤란을 겪고 있다. 또한 판타지소설이나 초현실주의, 부조리연극 같은 것들과는 어떻게 차별성을 유지해 나갈지도 문제이다. 게다가 ‘미래주의’나 ‘미래학’과 충돌하는 부분도 있다.”

위의 언급은 당시 한창 융성하던 뉴웨이브SF의 영향을 고려하는 접근이어야만 정확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뉴웨이브SF는 사실상 화석화 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위의 토플러의 전망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선구적인 혜안이 아니었던가 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는 슬립스트림Slipstream의 탄생을 예견한 것이 아니었을까?

문학의 한 장르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슬립스트림은 1989년에 사이버펑크 작가인 브루스 스털링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유체역학에서 고속 운동을 하는 물체 뒤로 주변보다 압력이 낮아지는 영역을 의미하며, 프로펠러의 후류나 자동차 경주에서 앞차에 바짝 따라붙는 드래프팅 기술 등이 슬립스트림의 보기로 거론되곤 한다. 한편 문학 장르로서 슬립스트림은 SF와 판타지, 주류 문학의 경계가 서로 섞이거나 혼합된 양상을 나타낼 경우 붙는 호칭이다. 스털링 본인은 이 용어를 ‘기묘함strangeness을 자아내는 이야기’로 설명했는데, 그 내면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판타지나 SF보다는 훨씬 확장된 시야에서 20세기 기술문명의 삶이 풍기는 어떤 기묘함을 포착하는 것이란 뉘앙스가 깔려있다. 그래서 슬립스트림은 기존의 장르소설보다는 훨씬 주류에 가깝지만, 주류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히 이질적이기도 하다. 이런 계열의 작가로서 돋보이는 인물 중의 하나로 마이클 셰이본을 들 수 있다. 주류(퓰리처상 수상:『캐벌리어와 클레이의 놀라운 모험』)와 장르(휴고상, 네뷸러상 수상:『유대인 경찰연합』) 양쪽에서 공히 인정받은 그의 소설들은 확실히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모호한 이야기들이다. 주류에서는 포스트모던으로, 그리고 SF 독자라면 뉴웨이브의 21세기 버전으로 진단할 수도 있겠지만 그 어느 쪽도 충분한 설명이라 하기엔 곤란하다.

답은 바로 ‘사이언스’ 픽션이란 말 안에 담겨 있다.

슬립스트림은 SF와 판타지, 그리고 주류문학이 상호 수렴해가는 양상이라고도 말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SF와 판타지 등의 모든 환상서사 문학을 포괄하려는 확장성도 느껴진다. 그렇다면 슬립스트림은 과연 SF가 진화해가는 미래상일까? SF의 외연이 넓어지다가 어느 순간 슬립스트림에 녹아들어가는 것일까?

굴드에 따르면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란 발전이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동하는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해가는 변화 그 자체를 뜻한다고 한다. 그 점을 유념하면 슬립스트림은 확실히 21세기를 질주하고 있는 현대 기술문명의 후미에서 SF나 다른 장르들이 서로 교란되고 뒤섞이는 양태를 잘 표현하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소설이란, 특히 SF란 늘 미래의 가능성을 미리 탐색해온 고독한 분야이다. 작가들은 질주하는 문명이 일으키는 후류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따라가기에만 급급한 존재들이 결코 아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을지언정 흙먼지 너머 앞쪽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를 늘 감각을 곤두세워서 포착하려 애쓴다.

결국 슬립스트림이란 명칭은 사전적 의미로 보면 어떤 과도기의 스케치일 뿐이지 그 자체로 SF라는 이름을 대체할 새로운 시대의 핵심 정서를 안고 있지는 않다. ‘경이감sense of wonder’은 명백히 ‘기묘함strangeness’과는 구별되는 SF 고유의 정신이다. 21세기가 경이감의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면, SF작가는 그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여전히 SF라는 이름으로 읽히고 회자될 것이다. 토플러가 지적한 SF의 새로운 정체성 모색은 바로 21세기적 정서란 어떤 환경이고 어떤 요구인지를 규명하라는 숙제이다. 답은 바로 ‘사이언스’ 픽션이란 말 안에 담겨 있다. 21세기는 ‘과학기술의 질주’라는 시대이고 시대 정서는 그 질주에 의해 교란되고 재편된다. 이런 환경이야말로 SF적 서사의 탐색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무대가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여전히 SF라는 기치 아래 우주의

무한한 서사의 가능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박상준

현재 서울SF아카이브 대표이며 SF전문출판 ‘오멜라스(웅진 임프린트)’ 대표와 장르문학 전문지 『판타스틱』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화씨451』 『라마와의 랑데부』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SF와 교양과학 관련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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