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판타지 도서관의 의미



얼마 전 언론에서 인터뷰를 위해 찾아왔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SF&판타지 도서관’을 만든 이유”에 대한 질문은 빠지지 않았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다. 도서관을 만들던 당시, 뭔가 큰 뜻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회에 소개했듯, ‘SF&판타지 도서관’은 한 술자리에서 지나가던 말로 시작했다. 물론 나름대로 진지하긴 했지만, 정말로 내가 가까운 장래에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하리라곤, 게다가 5년이나 계속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하고 싶다는 꿈 같은 말…… 뭐 그 정도였다.

하지만 농담에 가깝게 시작되었던 그 이야기는 불과 1년도 지나기 전에 현실이 되고 ‘SF&판타지 도서관’은 문을 열었다. 마치 게릴라의 비밀 아지트 같은 느낌이었지만, 사당동 주택가 지하의 작은 창고에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그리고 여러 출판사와 팬들이 보내준 책들을 모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작하고 얼마 동안 도서관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연합신문을 시작으로 여러 언론에 소개되고 그로 인해 찾는 이들도 하나 둘 늘어나기도 했다. 물론 그 관심이 계속되진 않았고 곧 주말을 제외하면 찾는 이 별로 없는 조용한 장소로 바뀌었지만, 이따금 찾아온 팬들 덕분에 충실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비록 임대료도 나오지 못하고 운영은 자원봉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부실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지금 도서관이 열려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이따금 들어오는 인터뷰에 “SF와 판타지 장르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면 좋겠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뜬구름 잡는 식의 인사말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은 그냥 도서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마냥 좋았다.


책장 앞에 앉아 책을 보는 이들. 도서관은 내게 놀이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SF&판타지 도서관이죠? 관장님과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 제 아들이 지금 고등학생인데, 판타지 소설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해요.”

당황했다. 사실 당시 ‘SF&판타지 도서관’은 내게 새로운 놀이터이자 장난감이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런 놀이터의 소식을 보고 한 학부모께서 전화를 한 것이다. 단지 SF와 판타지를 좋아할 뿐인 청년인 내게. 그 목소리는 굉장히 고민하는 듯했고, 얼마나 힘든 마음인지 느낄 수 있었기에 처음에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간단한 질문으로 시간을 끌며 머릿속을 정리한 끝에 겨우 몇 가지 얘기를 끄집어냈고 학부모 분의 감사 인사를 받은 것은 기억하지만, 지금 생각해보아도 당시 내 얘기가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날 일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과연 ‘SF&판타지 도서관’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나, 라고.

 

‘SF&판타지 도서관’은 한국 내,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최초일지도 모르는, SF와 판타지 장르만 다루는 전문 도서관이다. 만화책을 포함하여 만 

5천권 정도의 장서를 소장, 전시하고, DVD 등 1000여점의 미디어 자료를 갖추고 있는, SF나 판타지 팬들, 주로 SF팬에게는 꿈과 같은 곳이라고, 아니 기적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사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SF와 판타지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척박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일본에는 ‘SF 도서관’ 같은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전문적인 SF 코너가 있으며(대표적으로 캐나다의 SF 작가인 주디스 메릴이 20만 권 가까이 기증하여 완성된 토론토 공립 도서관의 ‘메릴 콜렉션’이 있다.) SF 작가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대학에 SF 강좌가 수없이 존재하며, SF 창작 클럽이나 강연회도 자주 열리는 반면, 한국에서는 서점은 고사하고 도서관에서조차 SF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군가 ‘SF&판타지 도서관’은 오아시스라고 한 적이 있다. 사막에 존재하는 오아시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묘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이야말로 한국이 SF와 판타지, 장르 문화의 불모지란 말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SF&판타지 도서관’은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장르 문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에 만든 곳이긴 했어도 생기고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르니 그 자체가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때가 있다. 적어도 내게 도서관은 단순히 놀이터로서의 공간,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만약 지금의 내게, 그리고 ‘SF&판타지 도서관’에 같은 전화가 걸려온다면, 나는 자신을 갖고 말할 것이다.

“언제고 아드님과 함께 SF&판타지 도서관을 찾아주십시오. 감동할 수 있는 책을 벗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벗하면 단순히 책에만 빠져서 현실을 멀리하진 않을 겁니다.”




전홍식

SF&판타지 도서관 관장. 디지털 문화 정책 석사 전공. 게임 기획자이자 강사로 활동 중.

독서가 취미로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읽는다. 항상 즐거운 삶을 나누고 싶은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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