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소설(이하 SF)의 묘미는 무엇일까? 장대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벌이는 모험을 보면서 느껴지는 쾌감일까, 아니면 치밀한 과학적 사고로 도출되는 지적 만족감일까, 아니면 대한민국 상위 0.001퍼센트의 사람들만 가진다는 배타적 멤버십을 보유했다는 만족감일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각양각색인 만큼 사실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도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대체로 보면 희미한 그 공통점을 일컬어 ‘경이감’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SF업계에 종사하면서 지금 어떤 ‘경이감’을 느끼고 있을까?

우선 내 입장에서는 가장 궁금했던 수수께끼가 하나 풀려서 기분이 좋다. 출판계에 입문하기 전, 나는 도대체 SF 바닥이 얼마나 힘들어서 대기업도 간만 보고 발을 빼며, 중견 출판사들도 찔끔 싸고 도망가는지 정말 너무 궁금했다. 에누리 없는 장사 없다더니 뻥 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애정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분노도 들었다. 하지만 출판사에 취직하지 않는다면 알아낼 수 없는 정보니 내가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항해의 중간기착지에 도착해 주판을 튕겨보니 앞으로 판매될 수 있는 최대수치는 권당 대략 평균 300권 수준일 듯하다. 이 중 20퍼센트 정도는 도서관 납품용이었으니 개인고객의 수는 아마도 250명 언저리 수준일 것으로 생각된다. 약간은 이른 판단이지만, 선인세도 회수하기 힘든 실적이니 최초의 실험모델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가 적다고 실망한 건 아니다. 이 바닥에 뛰어든 나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모두 이 정도 수준일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상적인 상업논리로만 치자면, 어쨌든 큰 출판사들이 이 바닥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절대 발 붙일 수 없는 황무지다. 하지만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말자. 『달을 판 사나이』의 주인공인 디디 해리먼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논리대로 수십억 달러의 자산을 부동산에 투자해 월세만 받아먹고 산다거나, 대부업을 통해 이자로 재산만 불린다면 주변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의 허세만 만족시켰을 거다. 그리고 그가 그런 삶을 살았다면 평생 몸은 편했을지 몰라도 아마도 마지막 눈감는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의 소중한 인생과 꿈을 남만 만족시키느라 희생시킨 선택에 대해 후회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들 역시 그의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SF의 또 다른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주인공. 사실 달에 가는 것도 유치한 수준이다. 코찔찔이 애송이가 외계 침략으로부터 인류 전체를 구원하고, 심지어 장애를 가진 아이도 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우주와 전쟁을 벌이지 않는가? 시련의 스케일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힘들다 소리나 하지, SF팬으로서 고작 책 팔이가 힘들어서 나자빠지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일찍이 맹자가 자신의 왕도를 설파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하늘의 때가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들 사이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출판계로 치자면, 하늘의 때天時는 경제상황이요, 땅의 이로움地利은 해당 분야요, 사람들 사이의 화합人和은 독자다. 인터넷서점도 매출이 줄어드는 최악의 시장상황에, 하필이면 안 팔리기로 유명해 모두가 정체를 숨기고 판매하는 SF 분야에, 독자수도 전체인구의 0.0006퍼센트만 존재하는 이곳에서 살아남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인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250여명의 독자층이야말로 훌륭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수는 적더라도 10년 넘도록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에서도 살아남은 소수의 열성팬들이다. 맹자도 말했듯 천시, 지리보다 중요한 건 인화다. 300명의 스파르타 군사가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을 막아낸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은가? 아니, 부서지기 직전인 12척의 배를 가지고 300척이 넘는 적의 정예함선을 명랑에서 박살낸 충무공의 선례도 있지 않은가?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전을 이끈 전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악한 품질이지만 서슴없이 책을 사주고,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도서관에 신청까지 해주는 훌륭한 독자들이 있고, 게다가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려고 독자들과 알라딘 측에서 특혜에 가까운 스페셜 북펀드도 성사시켜줬는데 회사가 망하게 된다면 운영전략을 잘못 세운 출판사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전략이 있을 수 있을까? 사실 글을 적고 있는 나도 모른다. 위력적인 투구로 경기를 압도하는 투수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요리조리 꾀를 굴려가며 맞춰 잡는 형태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구매자 수는 큰 변동을 보이지 않는 일종의 상수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기반을 두고 전략을 세워야만 할 것이다. 

그중 한가지로 북펀드를 예로 들어보자. SF분야에서 기존 방식의 북펀드는 성공하기 힘들다.(우리가 했던 건 구매까지 일정 부분 해주는 스페셜 북펀드였음을 감안하자) 북펀드도 일종의 채무인데, 채무를 갚기 위해서는 빌린 돈(A) 이상의 돈(B)을 출판사가 벌어야 한다. 그런데 (B)가 (A)보다 훨씬 못 미치는 지금의 상황에서 북펀드를 성사시키더라도 결국 출판사는 대출을 받아서 (A)를 갚아야 할 수밖에 없다. 당장의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고 결국 부채는 쌓여가다 언젠가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전통적인 전략으로는 절대 이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어떤 전략이 있을 수 있을까? 역시나 답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내가 하는 고민 역시 이전의 누군가가 분명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맸을 거라는 점이다. 참고할 수 있는 그 기록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라져버렸다. 특히나 온라인상에서 축적되었던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다. 박상준 선생이 운영하는 SF아카이브란 곳이 있지만, 비공개이며 심지어 주소도 나오지 않는다. SF판타지 도서관도 서적 위주라서 온라인 자료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 PC통신 시절의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의 게시판은 물론이고, △정크SF, △월간 SF웹진, △SF readers 같은 장소에 쌓여 있던 자료 모두 유실되었다. 온라인 자료의 문제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책으로 나왔으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라도 해 새로 진입하는 뉴비나,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을 터인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 그곳에 쌓여 있는 서평들이나 분석 글들은, 직접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이후에도 크게 상황이 변하지 않은 국내 SF시장 상황상 지금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누군가 자료를 백업해놓으신 분 있으시면 아래 필자 약력의 이메일 주소로 연락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지금은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상시적(?) 비상 상황이다.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 같다. 가끔 언론기사나 SNS 계정을 통해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 발언 뒤에는 ‘가족 때문에’, 또는 ‘현실 때문에’ 결국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SF출판업은 사람들이 꿈꾸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좋은 분야다. 우리 회사만 보더라도 첫 출간 초기에 번역자 갈아 마신다고 롤러코스터를 탔던 그 모습은 한 편의 액션 스릴러였고, 지금 판매량을 보면 호러며, 인간이 불쌍하다고 한 푼 두 푼 건네주신 독자님들과 무료 노예사역에 동원된 친구들의 우정을 보면 휴먼 드라마다. 아직 흥행 결과도 나오지 않아 흥미진진한 한 편의 영화이자 드라마다. 책도 내고 영화 속 주인공도 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 나 같은 문외한도 무능함을 드러내는 뻔뻔함과 욕 먹을 용기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니, 많은 분들께서 이 분야에 동업자로 참여해주시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백지장도 여러 사람이 들수록 일은 더욱 쉬워진다.





안태민(firebird_pub@naver.com)

SF출판사인 ‘도서출판 불새’에서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돌부처 대표를 상전으로 모시고, 계약, 번역, 편집, 판매, 세무 등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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