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한국에서도 장르소설이 대세가 되는가 싶었다. 미스터리, SF, 호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출간하는 황금가지의 밀리언셀러클럽이 2004년에 출범했고, 2006년 비채의 모중석 스릴러 클럽이 가세하면서 2007~2008년에는 마치 장르문학이 출판계의 대세를 이루는 것 같은 착시현상마저 일으켰다. 황금가지(민음사), 비채(김영사), 문학동네, 노블마인과 시작(웅진) 등 대형 출판사에서도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문학이 대거 쏟아져 나왔고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과 기리노 나쓰오의 『아임 소리 마마』 등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도 영화 개봉 덕에 뒤늦게 불티나듯 팔려 나갔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온다 리쿠 등 인기 작가들은 20편이 넘는 작품이 꾸준하게 출간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07년에는 장르문학잡지 《판타스틱》도 창간되었다.

하지만 잠시였다. 《판타스틱》은 폐간했고, 야심차게 시작했던 출판사들은 장르문학을 접었고, 출간되는 종수도 줄었다. 그렇다고 파산은 아니다. 인기 작가들의 작품은 꾸준히 나온다. 새롭게 뛰어든 출판사들도 많이 있다. 다만 불만은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안전한 작품들,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주로 나오고 있다.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같은 소설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 3부작에 이어 다른 작품들은 과연 나올 수 있을까? 마이너한 성향의 장르소설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셜록 홈즈가 몇만 부가 팔린다 한들 그건 추억의 소비일 뿐, 장르문학 전체의 시장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꾸준하게 장르문학을 읽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안정적인 독자들이 성실하게 좋아하는 작가, 작품을 소비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취향으로 뻗어 나가는 것.

다시 생각해봤다. 그렇다면 왜 장르소설을 읽는 것일까? 나는 왜 범죄소설을 비롯한 장르소설에 빠지게 된 것일까? 딱히 추리소설에 빠져든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취미를 놓지 않고 죽 가져온 것뿐이다. 어른이 된 이들이 추리소설을 왜 읽지 않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추리소설의 순수한 오락성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밀실과 완전범죄라는 요소가 작위적이고 일종의 게임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게임도 필요한 법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을 보면, 아무리 작은 범죄라도 세상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단 한 번도 도시에 나가보지 않은 미스 마플이지만, 그녀는 세상의 모든 법칙과 사람들의 다양한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인간의 격정적인 감정과 치밀한 두뇌게임이 버무려지는 각종 범죄에는, 세상사의 일면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다른 장르도 그렇다. SF는 ‘과학’이라는 틀 안에서, 인간의 존재를 다시 생각한다. 인간만이 유일한 지적 생명체가 아닌 세계에서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하고, 주변 환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상황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판타지는 과학 대신 ‘환상’을 활용한다. 공포소설은 우리 내부의 비합리성, 어둠의 존재를 일깨운다. 공포소설이 SF나 범죄소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아닌 타자의 존재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범죄소설, SF와 판타지, 공포소설 등은 단순하게 장르 자체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장르소설 역시 ‘소설’이고, 자체의 궤도를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것을 욕망한다.

이미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은 문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단순하게 오락만을 위해서 즐기는 소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탐구와 세계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우수한 소설로 평가한 것이다. 순문학에서도 추리 기법을 이용한 소설들이 많이 등장했다. 장르문학이라고 했을 때, 지나치게 규정이 협소해지는 위험이 있다. 어떤 장르를 표방하고 있건, 그것이 소설 자체의 가치를 규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장르로 소설이나 영화를 구분하는 것은 그 구조와 형식을 따지는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매년 베스트를 꼽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1988년부터 2008년까지 통틀어 베스트를 골랐을 때, 해외 작품에서 1등을 한 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었다. 『장미의 이름』은 분명히 미스터리이지만, 동시에 탁월한 정통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장르만으로 『장미의 이름』을 규정하는 것은 분명히 무리가 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가 『치료탑 혹성』 『2백년의 아이들』 등의 작품에서 SF 기법을 활용하지만 그를 SF작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빼앗긴 자들』 『어둠의 왼손』의 어슐러 르귄이나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테드 창은 SF 작가로 분류되지만 그들의 작품은 웬만한 정통 문학보다 탁월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는, 미스터리는 범죄를 조장하고 SF는 황당무계하다는 등의 편견과 선입관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장르문학을 표방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대중적인 저변이 확대되기도 힘들었다. 반대로 장르문학 역시 문학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변하는 쪽에서는, 역설적으로 장르문학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때로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는 일종의 역차별도 있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을 쓰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쓰면 독자가 더 즐거워하고 재미있어 할까” 라고 말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미스터리로서도 A급이고, 문학성을 따져도 상위권에 속할 작품이 허다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지향은 ‘엔터테인먼트’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순수문학, 정통문학과의 구별을 원한다면 장르문학보다는 대중문학이나 엔터테인먼트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장르소설, 대중소설은 단지 도피일까? 나는 도피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책을 잡으면, 다음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소설들이 좋다.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좋다. 단지 킬링타임이라고 해도, 나는 그 매혹에 기꺼이 빠져들 용의가 있다. 다만 그 이상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좋은 것은 그냥 좋지만, 가끔은 그걸 넘어선 걸작에서 어떤 ‘빛’을 발견한다. 고전이나 걸작들에서 맛볼 수 있는 위대함. 장르를 표방한 소설이 어떤 지점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제대로 찾아내고, 알리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킬링타임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도 더 많이 필요하다. 양적으로 풍부해져야만 그 안에서 걸작들도 자연스럽게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니까.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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