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자책 매출의 미비함에 대한 실망


“요즘 한 달에 10만 원 정도는 버세요?”
얼마 전 한 출판 세미나에서 모 영업 담당자 분이 나에게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였다. 그 말을 던지는 얼굴에는 비웃음이 역력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도 전자책 한두 권 내봤는데, 매출이 10만원도 채 안 나와서 담당자가 얼굴을 들지 못해요.”
비웃음이든 아니든 간에 상당수 출판사들은 전자책 매출이 매우 적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도 위에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처럼 처참할 정도로 작은 숫자를 기록하면서.

앞서 우리는 출판사가 기술적인 장벽 때문에, 그리고 불법 복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전자책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확인했다. 출판사가 전자책을 만들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 그리고 어쩌면 보다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큰 이유를 이번 기회에 글로 옮기며, 이 졸문의 연속을 마치고자 한다.

세상 모든 비즈니스는 결국 돈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아무리 문화 산업의 첨병이자 시대의 양심 같은 고상한 언어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출판산업 역시 돈이라는 최종 결과물을 내야만 하는 산업이라는 범주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물론, 고매한 인격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장님들은 아니라고 말씀들을 하시겠지만) 그렇기에 어쩌면 당연하게도 많은 출판사들이 단기적으로 매출이 미비하게 나온 것을 이유로 들어, 중도에 전자책 개발과 판매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책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 당연히 으레 전자책은 안 되는 걸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자책 매출의 미비점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외적인 부분을 언급한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매우 적고, 그보다 더 적은 전자책 독서 인구는 당연히 더 쪼그라드는 형국이라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지, 책을 읽겠느냐고. 나는 이 말들을 모두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런 외부적인 요인 외에 출판계 내부의 문제, 즉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과연 없는 걸까?
앞서 10만 원을 언급한 출판사에서 내놓은 전자책은 내가 알기로는 작년 기준으로 총 5권이었다. 흔히 출판사는 지금까지 출간한 종수, 즉 백리스트로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전자책 분야에서 달랑 5권으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다. 처음 내가 길벗출판사에 입사했던 2010년도에는 20권 정도의 전자책을 제작했다. 그 당시의 매출은 저 위에 언급한 숫자의 몇 배였다.(사실, 그것도 큰돈은 아니었지만) 책의 내용과 퀄리티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시장에 내놓은 상품의 가짓수가 적다면 매출이 적은 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현재 길벗은 400종이 넘는 전자책(2013년부터는 ePub3제작)을 보유하고 있다. 매출은 이미 억 단위에 들어선 지 한참이다. 결국 종이책과 마찬가지로 전자책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숫자가 기본적으로 받침이 되어야 매출을 낼 수 있다는 게 내가 얻은 결론이다.
앞서 언급했던 회사의 전자책 5종도 종이책으로 나왔던 신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자책 전용의 기획으로 나왔던 도서들은 더욱더 아니었다. 최소한 2~3년 전에 나왔던 책이었고, 5년이 훨씬 지난 책도 목록에 있었다. 자신들이 출간한 책이 시대를 뛰어넘는 마스터피스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정보성 유통기간이 지난 책들을 단지 전자책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팔릴 거라는 생각은 조금 순진한 게 아니었을까? 오히려 이렇게 오래된 책을 전자책으로 구입해주신 얼마 안 되는 독자분들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구간을 전자책으로 만들려는 생각은 지난번에 언급한 불법 복사에 대한 두려움도 한몫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복사로 인한 매출 타격이 적을 거라고 보기에 시일이 지난 책을 전자책으로 만든다는 발상이다. 그런데 출판사 내부에서도 상대적으로 가치를 낮게 보는 책들을 과연 독자들이 선택해줄까? 길벗출판사에서는 2013년에 종이책 신간 도서의 약 50퍼센트를 전자책으로 제작해서 공급하고 있다. 유아 학습지 부분을 제외하면 사실상 출간된 성인 단행본 거의 대부분을 전자책으로 제작해서 공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연히 그에 따라서 매출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만약 전자책 매출이 잘 나오지 않는다면, 위에 언급한 두 가지를 한 번 살펴보길 바란다. 해당 출판사에서 출간된 전자책의 총 종수는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신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마지막으로 전자책 매출이 적은 이유로는 품질 문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전자책을 보여주는 뷰어 프로그램들과도 연관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출판사에서 전자책을 제작하는 데 얼마나 공을 들이는가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앞서 연재한 글에서 나는 출판사가 전자책에 대한 기술적인 배경 지식이 부족하고, 인력 채용, 제작비 등을 잘 투자하지 않는다는 걸 지적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상당수 출판사들의 전자책 종수가 적은 건 물론이거니와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독자들은 메모장 수준 정도의 전자책을 외면하고, 이로 인해서 매출이 일어나지 않는 것
이다.

아래의 인터넷 링크 주소는 작년에 내가 디자인해서 제작한 『에지 애니메이션 CC 무작정 따라하기』이다
https://play.google.com/store/books/details?id=8TaFAgAAQBAJ

가격이 다소 비쌀 수도,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어려움 때문에라도 구입이 망설여질 수도 있겠지만, 큰 맘먹고 한 번 질러 보길 바란다.
적어도 당신이 아직 책을 사랑하고 이 업계에서 더 오래 살아남고자 한다면, 전자책이란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치를 느끼는 데 16800원은 결코 큰돈이 아니다.
출판사를 창업하려면 적어도 10권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예비 원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경기가 어려워서 그 종수가 더 늘어났지만, 이 말은 역시나 출판사가 가지는 백리스트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자책 역시 의미적인 매출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규모의 종수가 필요하다. 길벗출판사처럼 실용서를 내는 곳에서는 적어도 100권 정도는 되어야 의미 있는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량만큼이나 중요한 점은, 독자분들에게 종이책보다는 품질이 떨어져 보인다는 말은 듣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책 매출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냉소적인 평가를 하시거나 실망하시는 출판계 관계자 분들께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전자책을 책으로 보고 계셨었는지요?”



이광희

『Epub 전자책 제작 테크닉』 저자. 도서출판길벗의 전자책 기획및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전자책으로 언젠가 단편 영화, 인디 밴드 음반, 소규모 교육용 게임을 서비스할 거라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

on 우주 짝수호마다 “이광희의 전자책 이야기”를 연재한다.



나는 태양을 삼켰다.

내 눈에는 언제나 송곳 구멍처럼 작고 빨간 동그라미가 보인다.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으면, 그 원은 붉은색과 초록색의 테를 두른 강력한 금빛으로 빛난다. 눈을 뜬 채로 한곳을 응시하면 작고 선명한 점멸등이 천천히 떠오른다. 그 등은 내 눈의 깜박임에 따라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번갈아 바뀐다. 내가 삼킨 태양의 마지막 흔적이다.


“이 개자식!”

고상하지도 참신하지도 않은 욕설과 함께 주먹이 날아들었다. 나는 보통 사람으로선 볼 수도 없는 움직임으로 슬쩍 주먹을 피하고 다시 감상으로 되돌아갔다. 사실 감상을 즐기기에 적합한 때는 아니었지만 어쩌랴, 이미 생각이 흐르기 시작한 것을.

‘그때’, 나는 불면증에 걸려 있었다. 

벌써 두 달 가까이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잠이 오지 않으니 밤이 너무 길었다. 달리 할 일도 없었다. 텔레비전, 컴퓨터, 게임, 책, 아무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전화를 걸어 밤새 얘기할 친구도 없다.

밤의 침묵은 숨 막히게 깊고 무거웠다. 

침대 머리맡엔 달콤한 피로 대신에 새벽 전의 어둠처럼 짙고 무거운 한숨이 가득 고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한숨이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뭉게뭉게 자라서 먹구름처럼 크고 무겁고 조밀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난 내 한숨이 거기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불 속에 웅크린 나랑 똑같은 모습으로. 

나는 실연당했다.

원희는 어깨에 둘러진 내 왼팔을 조용히 끌어내, 내 심장 가까이 옆구리에 되돌려 놓았다. 또 5년 동안 그녀를 향해 내밀어져 있던 내 손도 되돌려 놓았다. 원희는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5년 동안 원희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문제였고, 앞으로도 거기에 답할 생각이 없음을 그녀는 5년간 무수히 나에게 말해왔다. 구슬리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유혹하고, 갖은 방법을 썼지만 원희와 나 사이에 한 뼘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기에 지쳤고 그마저도 그녀에게 폐로 느껴져서 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받은 것을 모두 돌려주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렇게 해주길 원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되고, 거기에 있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과거’라는 시간만이 침묵으로 남았다. 원래부터 거기에 아무것도 없었고, 내가 느끼는 공허와 고독 모두 늘 거기에 있던 것처럼 익숙했다. 나는 진짜 원희를 만났던 것이 아니라, 원희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따뜻하고 애달파서 잠이 깬 뒤에도 오래오래 생각이 나는 그런 꿈을.

그러다가 그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은 오랫동안 열지 않은 이메일 함 속에서 스팸 메일에 짓눌려 바짝 졸아붙어 있었다. 마치 잊어달라는 원희의 공격에 짓눌린 내 미련처럼, 지워지고 지워지고 지워지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억의 증거처럼.

정확한 철자조차 헷갈리기 시작한 그녀의 아이디만이 출처를 확인시키는 사진은, 원희의 얼굴이 아니라 외국 어딘가에서 찍었다는 일출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싸이월드에 굴러다니는 원희의 얼굴보다 그쪽이 그녀가 거기 정말로 존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진 속엔 어둑한 하늘과, 보라색 비늘이 번뜩이는 수면이 있었고, 그 위에 방금 토한 것처럼 붉고 선연한 핏자국을 길게 남긴 태양이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조금 울었다.

— 봐봐, 적도에선 태양이 이렇게 뜬대, 왜, 어떤 그림에 보면 태양 주위에 방사선을 그리잖아? 정말로 그대로였어, 신기하지?

신기해.

— 언젠가 보러 가고 싶어.

그래.

— 칫, 너랑 안 갈 건데.

알아. 

나는 메일 창을 닫고 잠시 눈을 감았다. 원희가 마지막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느새 잠들지 못한 아침이 지친 몸을 끌고 마룻바닥을 기어 오고 있었다. 

일하러 나갈 시간이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오늘과 똑같은 내일로 잔인하리만치 아무렇지 않게 흘렀다. 그러나 내 속의 오늘은 어제와 같지 않고, 내일은 오늘과 같지 않았다. 상처를 아물릴 길 없는 마음은 분풀이로 몸을 갉아 먹었고, 마음에 갉아 먹힌 몸은 대가를 고스란히 마음에게 되돌려서 나는 이제 어느 것 때문에 힘든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일상이 위태롭게 휘청였다.

— 산책을 해요.

늦은 저녁 퀭한 눈으로 편의점 문을 나서던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자 자질구레한 물건으로 가득 차 더욱 좁은 편의점 계산대 안에 점원이 나를 보고 있었다.

— 예?

— 잠이 안 오면 산책을 해요. 그럼 오히려 피로가 풀려요. 단 다음 날 힘들 정도로 무리하면 안 돼요.

점원은 생긋 웃었다. 동그란 얼굴에 희고 고른 치아가 돋보였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점원의 미소에는 낯익은 사람에게 보내는 친근함이 듬뿍 담겨 있었다. 덕분에 뻣뻣한 내 쪽이 무색해져버렸다.  

— 여자분 혼자 한밤중에 무섭지 않아요? 흉한 일 없어요?

생각해보니 언젠가 내가 먼저 말을 걸었었다. 그냥 어느 변덕스러운 날 낯익은 동네 사람에게 보내는 눈인사 정도였다. 젊은 여자가 늘 한밤중에, 그것도 혼자 편의점을 지킨다는 건 별로 권장사항이 아니다. 우리 동네가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주정뱅이의 행패는 어디서나 있을 법하고, 좀 더 재수가 없다면 깡패나, 강도가 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랴. 

— 아뇨. 별로요.

— 야간은 남자도 힘들던데, 야간엔 물건 들어오잖아요.

— 대신 돈을 많이 주잖아요.

— 밤에 안 자면 피부 미용에 안 좋다던데요?

점원은 피식 웃었다. 나는 멋쩍어져서 들고 있던 캔 뚜껑만 딸각딸각 튕겼다. 그녀의 피부는 티 한 점 없이 희고 매끄러웠다. 남자가 여자의 화장술을 어찌 꿰뚫어 보랴마는, 그래도 그녀는 꽤나 맑고 선명한 얼굴이었다. 화장을 아무리 잘해도 그런 것까지 꾸며낼 수는 없다는 건 사촌 누나들 덕분에 아주 잘 배워두었다.

— 요즘도 나오시네요.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 계속 있었는데요.

점원이 말했다.

— 아, 네……. 잘 못 주무실 텐데 안 힘드세요?

나는 애꿎은 캔 뚜껑을 그만 집적대기로 하고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점원은 스캐너로 계산했다.

— 괜찮아요. 익숙해서요.

돈을 내고 편의점을 나왔다. 열린 문을 놓는데 점원이 가볍게 눈인사했다. 나도 답례했다. 나쁘지 않았다. 저녁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아주 약간 밤이 가벼워졌다.


점원의 충고에 따라 밤산책을 시작했다. 자정부터 4시까지 길이건 공원이건 산이건 닥치지 않고 새벽 5시 안에 돌아와 출근할 수 있는 거리라면 어디든 걸었다. 씻고 누우면 잠은 여전히 오지 않더라도 머리맡의 한숨이 조금 덜 버거웠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이란 건 그런 식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불면증은 계속 심해져서 아무리 아파도 잠도 못 자고 고스란히 앓아야 했다. 나는 다른 의미로 잠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잠은 세상의 그물에 걸린 육체에서 달아나 숨을 수 있는 유일한 작은 방이었다. 

— 괜찮아요?

점원이 말을 걸었다.

열이 들끓는 몸에 발밑이 빈 것처럼 허우적대며,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걸까, 여기까진 대체 어떻게 온 걸까, 그런 걸 생각하기도 전에 점원의 양손이 내 뺨에 닿았다. 발그스름하게 혈색 좋은 뺨과 뜨거운 입술과는 달리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뭘 원해요?

— 자고 싶어요.

정말로 깊고 조용히, 가능하면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나는 너무나 피로했고 정말로, 잠이 절실

했다.

— 잠깐 기다려요.

점원은 주섬주섬 카운터를 정리하고 전화를 두 통 걸었다. 짧은 사정 설명이 끝나자마자 젊은 남자가 들어와 점원과 자리를 바꿔주고 그녀는 직원실에 들러 짐을 챙겨 나왔다. 

— 가요.

모든 게 의지 밖의 일이라서 나는 멀거니 구경만 했다. 내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걸 이내 깨달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어쩌면 돌이키고 싶지 않았던 거 같기도 하다. 

우리는 어느새 내 옥탑방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내가 여기를 안내했었나? 그럴 만한 힘이 남았었던가.

— 정말로 자, 고, 싶어요?

— 네.

그녀는 웃옷을 벗었다. 

— 아, 잠깐만요.

나는 혼미한 정신을 일깨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 상황을 묵인할 수는 없다.

— 안 돼요. 저 마음에 둔 사람 있어요.

차마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내 사랑은.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까.

점원은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저렇게 치아가 흴까? 피부는 너무나 매끄럽고, 입술은 붉고, 눈은 반짝인다. 놀랍게도 화장은 전혀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예뻤던가?

— 괜찮아요.

— 난 안 괜찮아요.

— 괜찮을 거라니까요?

— 글쎄! 안 괜찮다니까요!

나는 버럭 화를 냈다가 곧 수그러들었다. 입씨름할 기운도 없다. 점원은 내 손을 끌어다 자기 가슴에 얹었다. 크지 않지만 뚜렷하고, 모양이 좋은 젖가슴이었다. 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 긴장하지 말고 그냥 느껴봐요.

— 뭘요?

아무리 아파도 이 상황이라면 누구나 긴장한다.

— 있어야 할 게 없잖아요?

어이가 없었다.

— 뭐가요? 둘 다 있구만.

점원은 웃었다. 아찔하게 향기로운 웃음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았다. 웃음에서 향기가 나다니.

— 들어봐요. 심장 소리가 없어요.

점원은 내 다른 손을 내 가슴에 얹었다. 두근두근 내 심장 박동 소리가 그녀 안의 침묵을 더 크게 확장했다.  

— 나는 당신을 조용히 재워줄 수 있어요. 원한다면 영원히 깨지 않도록.

— 어떻게요?

안일한 고민이 부끄럽게도 그녀는 나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점원은 천천히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 나, 흡혈귀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붉게 피어오른 장미처럼 아름다웠다. 가슴이 저릿했던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한 장면처럼, 세상은 온통 장미 꽃잎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화 속의 그 남자도 이런 아찔한 향기로움을 느꼈을까? 눈앞이 아득해서 목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내 어깨에 걸쳐진 그녀의 목에서 꿀꺽하고 넘어가는 간지러운 느낌으로만 정말로 그녀가 피를 마시고 있다는 걸 알았다.

— 봐요, 진짜예요, 그러니까 잘 생각…….

— 마셔요.

나는 그녀가 몸을 떼려는 걸 꽉 잡았다.

— 그냥 끝까지, 마셔요.

흡혈귀한테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걸까? 먹으라고 하는 걸까? 아, 모르는 사이니까 드세요? 아니, 나 지금 피 빨려서 죽는 건데, 죽여주세요, 하는 걸까? 왜 이런 진지한 순간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머릿속에 떠다니는지는 모르지만, 편안했다. 조금 나른하고, 졸린 느낌이라는 게 이렇게 달콤하구나, 아찔할 만큼.

그날 밤은 정말로 편히 잤다. 

그대로 영원히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새벽에 눈이 떠졌을 때, 나는 영원한 꿈을 꾸고 있다고 느꼈다. 꿈은 내 방에서 시작되어 거실로, 현관으로, 세상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지독하게 목이 말랐다. 부엌으로 물을 가지러 가는데 창문에서 비쳐든 붉은 빛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태어난 첫 아침처럼 아파트 틈새로 조금씩 번져오는 빛은 붉고 수줍었다. 낮 동안 오만 가지 색으로 현란하게 치장했던 도시는 밤새 진중하고 우아한 어둠을 입었다가 새벽의 무자비한 손길에 낱낱이 발가벗겨지고 있었다. 창백한 미명은 세상의 온갖 색을 빼앗고 명암만으로 존재를 자각시켰고 도시는 어떤 대응책도 갖지 못한 채 조용히 웅크려 떨면서 수치스러운 시간을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떠올랐다.

잘린 손톱 끝처럼 안타깝게 반짝이던 빨간빛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원형을 확립하며 조금의 주저도 없이 강렬하게 타오를 때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의 맨눈에는 충분히 무리한 시간이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창을 외면한 순간에야 나는 망막에 남은 상처를 깨달았다.

— 해를 맨눈으로 보면 안 돼.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이 의식 저쪽에서 끌려 나왔다. 아주 어릴 적, 깨진 맥주병 조각을 가지고 놀 때였다. 한 녀석이 조각을 눈에 대고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 뭐해?

— 해봐.

— 뭘 해보라구?

다들 녀석을 따라했다. 암갈색을 입은 세상이 부옇게 보일 뿐, 특별한 건 없었다.

— 그게 아니라, 해를 보라고.

모두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날카로운 파란색 테를 두른 동그라미가 보였다. 경악과 감탄, 혹은 실망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 정말! 보이네! 굉장해!

— 에게, 뭐야, 별거 아니잖아?

나는 혼자 슬그머니 맥주병 조각을 내렸다. 처음 해를 보기 시작한 녀석이 팔꿈치로 어깨를 툭 쳤다.

— 맨눈으로 보면 안 돼. 눈이 먼다고.

나는 눈을 비볐다. 그 말대로 망막에 화각된 둥그런 테는 사라지지 않았다.

— 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자 차갑게 말라붙은 혀가 입안에서 낯설게 뒹굴었다. 물을 마셔도 가뭄 든 논두렁처럼 쩍쩍 갈라진 목구멍은 버석버석했다.

일출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갓 태어난 새빨간 태양이 막 금색 옷을 걸치는 순간, 나는 몸을 꿰뚫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태양을 삼키고 싶다.

저 뜨겁고 촉촉한 열기라면 바짝 마른 혀와 언 몸을 따뜻하게 적셔주리라. 나는 공기의 질량보다도 가볍게 두둥실 떠오른 몸이 해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 과정은 아주 길고 어지럽고 산도를 거치는 태아처럼 침묵하는 비명과 뒤엉켜 있었다. 마침내 찰나이며 영원한 여정의 끝에서 해를 만나자 나는 크게 입을 벌리고 거리낌 없이 꿀꺽, 삼켰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향기가 입안을 적시며 차가운 혀와 갈라진 목구멍을 적셨다. 몸 안에서 굴러다니던 부식된 쇳조각 같던 남루한 마음이 신선하게 벼려졌다. 붉은 녹먼지를 열기로 태우면서 나는 새로워지고 있었다.

— 꺄악!

태양은 거칠게 반항하며 내게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나는 발버둥치는 태양을 꽉 껴안고 뜨거운 열기를 끝까지 들이삼켰다. 온몸이 녹은 쇳물처럼 열과 고통과 찬란한 광휘로 들끓었다. 마침내 하얗게 식은 태양이 흐릿하게 스러지자 내 눈동자 위에 초록색 동그라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 봐봐, 적도에선 태양이 이렇게 뜬대.

눈앞에 잠든 원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하다. 나는 그녀와 잔 적이 없는데.



“어쭈, 눈을 감아? 새끼가 약을 처먹었나!”

현실은 언제나 마음보다 느리게 흐른다. 나는 잠시 별세계에 떨어진 사람처럼 휘청거리다가 보기 좋게 한 대 얻어맞았다. 물론 내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어쨌든 녀석들을 빨리 쫓아내고 싶었고, 그게 내가 맑은 날 이불처럼 먼지 나게 두들겨 맞는 것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어차피 먼지만큼만 아플 테니.

그러나 내 겸허한 양보에도 놈들은 녹슨 앵글과 나무 막대를 꼬나들고 궁지에 몰린 개를 두드려 팰 쾌감에 미리부터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비켜만 주면 된다니까?”

내가 말했다.

“새꺄! 여기가 네 땅이야? 껌 붙여놨어? 네가 샀냐?”

“그럼, 너희가 샀나?”

겨울바람에 갈라진 목소리가 뱀의 혀처럼 쉿 소리를 냈다. 무리 중 하나의 얼굴에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예민한 초식동물이 포식자의 기운을 포착해낸 것이다. 나는 그에게 본능이 시키는 대로 어서 달아나라고 속으로 충고했다.

“이 씨발 새끼가 말을 못 알아먹네? 응?”

죽은 쥐를 꾹꾹 찌르듯 나무 끝이 내 몸을 쿡쿡 찔렀다.

“꺼질 건 우리가 아니라 너야. 너 다수결의 진리 몰라? 우리나란 민주주의 국가라고.”

“다수결의 원리겠지.”

“좆까.”

놈은 입술을 삐죽이다 침을 탁 뱉었다.

“그만 씨부리고. 야, 까!”

머리를 내리쳐 오는 나무토막을 오른쪽 어깨로 흘렸다. 그걸 신호로 놈들은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승부가 나는 건 잠깐이었다. 나에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미명이 썰물처럼 밀려와 세상을 벌거벗겼다. 나는 멈춘 비디오 화면처럼 느려 터진 그들의 얼굴과 팔을 맘껏 두들겨 패고 엉덩이를 걷어찼다. 다리나 발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달아나는 데 시간이 걸리면 곤란하다.

“윽!”

“우악!”

녀석들은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엉망이 된 얼굴과 팔을 싸잡고 시궁쥐처럼 내빼기 시작했다.

“이 새끼! 두고 봐! 가만 안 둘 거야!”

원한이 응집된 절규는 배경 효과로 내버려두고 난 녀석들에게서 빼앗은 관망대 — 정확히 말하면 공원의 허름한 계단 — 주위를 깨끗이 치웠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쓰레기들이 어울린 자리엔 쓰레기만 모였고, 쓰레기들이 달아나자 쓰레기만 남아 있었다.

“뭐야, 돌아왔네?”

겨울바람에 언 뺨에 따뜻한 캔이 닿아서 깜짝 놀랐다. 편의점 점원이었다.

“희정 씨?”

희정 씨는 자기 캔을 따고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캔을 따고 온기와 향, 갈색 액체 속에 녹아든 당분과 유즙, 시나몬 향기를 하나씩 꺼냈다. 그리고 기분 나쁜 방부제 냄새와 텁텁한 합성유지 냄새, 부패한 시간의 냄새를 빼고 다시 깨끗하고 신선하게 조합한 커피를 마셨다. 변화는 이런 것이 좋았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다. 

“긴장감 없는 얼굴은 여전하네요.”

스무 살이 갓 되었을까 말까 한 앳된, 조금 맹하기까지 한 부드러운 얼굴. 나는 희정 씨의 그 얼굴이 좋았다. 마주 보고 있으면 피시식 웃음이 나고, 이윽고 아주 편안해진다. 흔들리는 요람에 누워 엄마의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남 말 하지 마.”

희정 씨는 웃으며 투덜댔다. 도톰한 입술 아래 지나치리만치 고르고 흰 치아가 드러났다.

“본때를 보여주지. 여전히 맘이 약하네. 그냥 마셔버리면 될 것을.”

희정 씨는 양아치들이 쫓겨 간 쪽을 흘끔 보았다. 컬러 렌즈를 빼두고 왔는지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치우는 시간이 아깝죠. 제 발로 달아나게 하는 편이 수고를 덜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도 그렇네.”

웃음소리가 발밑에 바삭대는 낙엽처럼 가볍고 경쾌했다.

“그건 그렇고, 퍼즐은 아직이야?”

나는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벌써 몇십 년째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끔 건너뛰어도 어색하지 않다.

“어지간히 좀 해. 우린 흡혈귀지, 철새가 아냐. 외모 때문에 한곳에 오래 있기 힘든 사정이야 빤하지만, 이게 뭐야? 해마다 오락가락.”

“희정 씨야말로. 한곳에 이렇게 오래 있어도 돼요? 들통 나기 쉽잖아요?”

“여자는 괜찮아. 20년 정도는 옷이랑 화장으로 커버할 수 있거든. ‘어머, 어쩜 넌 나이도 안 드니!’란 소리도 꽤 듣기 좋다구.”

“정말로 그런 이유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

희정 씨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이유를 말해주진 않는다. 우린 피를 나누었지만, 나는 희정 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일출이나 잘 봐. 이상한 흡혈귀야. 해를 좋아하다니.”

희정 씨는 캔 속의 액체를 찰랑찰랑 흔들었다.

“희정 씨가 더 이상해요. 사람 음식을 먹는 흡혈귀라니.”

“이건 그냥 의태야. 이상하다면 당신이 더 이상하지. 피의 세례를 받지 않은 흡혈귀라니. 게다가 해를 좋아한다? 이런 몰상식한 일이 어디 있어? 종으로서의 수치라고.”

어디서 통하는 상식이며, 어떤 종의 수치인지 이제 묻지 않을 때도 되었다. 

“‘자기를 마신 흡혈귀의 피를 마셔야 한다’라. 희정 씨는 나를 마셨죠. 그런데 나는 희정 씨를 마시지 않았어요.”

“그래, 당신은 죽고 싶어 했으니까 이쪽으로 데려올 생각은 없었어.”

희정 씨는 빈 깡통을 공원 끝에 있는 쓰레기통에 한 번에 던져 넣었다. 

“아무튼 꼭 기억해냈으면 좋겠어. 그때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을 거야. 그게 변화의 촉매가 됐을 거고.”

“그건 제가 태양을 삼켰기 때문이라니까요.”

희정 씨는 내 어깨를 툭 쳤다.

“또 그 소리. 그럼 저기 밝아오는 건 뭐고?”

“그거야 전 모르죠. 하지만 분명히, 그때 해를 삼켰어요. 그래서 세례 없이도 변화한 거예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건 환상이야. 흡혈과 변화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거지. 정말로 기억 안 나? 그때 내가 한 말?”

“뭔데요?”

내가 물었다. 희정 씨는 손사래를 쳤다.

“나중에. 타는 건 질색이거든. 벌써 이렇게 오싹오싹한데, 대체 어떻게 해 뜨는 걸 좋아할 수 있지?”

희정 씨는 투덜대면서 여명의 첫 빛이 닿기 전에 밤이 달아난 방향으로 사라졌다. 희정 씨의 걸음이 너무 빨라서 등 뒤의 그림자가 늘어질 틈도 없이 돌풍만 흩어졌다.

나는 청회색 물감을 푼 것처럼 뿌옇게 밝아지는 동쪽을 응시하며 계단 밑으로 들어갔다. 난간이 넓은 경사진 계단 밑은 일출을 보면서도 그늘로 몸을 숨길 수 있고 여차할 경우는 계단 밑의 창고로 달아날 수도 있었다.

선연한 붉은빛이 구릉 구석에서 꽃처럼 피어오르자 기대감에 숨이 벅차 올랐다. 나의 빛나는 사신, 나의 연인, 나의 태양이 오고 있다. 입술이 떨리고 창백하게 질린 심장에서 피가 끓어오른다. 

— 깼어요?

죽은 줄 알았는데, 저 세상인 줄 알았는데, 태양을 삼킨 다음 눈을 떴을 때 희정 씨가 다시 옆에 있었다.

— 그쪽도 죽었어요? 아니 흡혈귀는 원래 이승 저승 할 거 없이 왔다 갔다 하나요?

그때 희정 씬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며 희정 씨를 놀리곤 한다.

— 미안해요.

— 뭐가요?

— 당신 안 죽었어요.

뒤통수가 멍했다.

— 뭐라구요?

나는 황급히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새삼 소름이 돋을 만큼 목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희정 씨는 안절부절못했다.

— 저기…… 실은 제가 좀 미숙하거든요. 끝까지 잘 마시면 되는데, 아니, 분명히 끝까지 마셨는데. 아니던가? 아무튼 그게 좀……. 설명하긴 그렇고. 아무튼 대실패예요.

어이가 없었다.

— 실패?

— 네.

— 그럼 다시 해요.

— 네.

— 다시 먹으라구요. 아니, 마시던가? 아무튼, 여기, 다시 깨물어요.

상처가 눈에 아렸지만 나름대로 용기를 짜내 목을 들이밀자 희정 씨는 손을 저으며 물러섰다.

— 이제 안 돼요.

— 뭐가 안 돼요?

— 그러니까…… 당신이 변해서, 이제 난 못 해요.

— 변했다?

희정 씨는 내 손을 내 가슴에 얹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냉기가 느껴졌다. 박동도 없었다.

— 이건 또 무슨 장난이죠?

— 장난 아녜요. 영화도 안 봤어요? 흡혈귀한테 물려서 변했다면 뭐겠어요?

— 좀비?

희정 씨가 뒤통수를 딱 때렸다. 눈 튀어나오게 아팠다.

— 흡혈귀?

장난으로 회피하려던 순간이 가득 찬 둑에 마지막 한 방울을 떨궜다. 진실이 터진 둑을 가르고 흘러 넘쳤다. 처음에는 하얗다가 점점 파래지던 희정 씨의 얼굴이 순간 완전히 새빨갛게 변했다.

—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진짜, 잘하려고 했는데…….

— 원래 이렇게 잘 못해요?

내가 말에 희정 씨는 거의 울기 직전이 되었다. 

— 미안해요.

— 뭐, 이것도 괜찮은 거 같네요.

나는 희정 씨를 다독였다. 변화는 이상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독하리만치 안심이 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불안정한 기분으로 다른 무엇을 찾아 헤매지 않을 것 같은, 가야 할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 목, 안 말라요?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던 갈증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목마르지 않았다. 목을 약간 큼큼 했다가 괜한 기침만 나왔다.

— 전혀요.

희정 씨는 안도인지 포기인지 모를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 이상하네요, 피의 세례를 거치지 않고 변화하다니. 어쨌든. 환영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흡혈귀가 된 걸 축하해요.

— 별로 축하 받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떨떠름히 말했다. 

— 미안해요.

희정 씨는 다시 침통해졌다. 

— 도와주시려던 거잖아요. 뭐, 잠은 잘 오겠네요. 낮엔 꼭 잘 거 아녜요?

나는 얼른 덧붙였다. 희정 씨가 놀리는 맛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그런데 왜 그렇게 못 잤어요?

희정 씨가 물었다. 원희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는 눈을 감았다.

— 몰라요. 기억 안 나요.

희정 씨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 희정.

— 에?

— 내 이름, 정희정이에요. 올해로 여든둘이 된, 어린 흡혈귀죠.

— 여든둘이 어려요?

— 내가 만난 누군가는 몇백 살은 가뿐히 넘어서 숫자 세기 귀찮아했어요. 어떤 흡혈귀는 몇 년 전에 천 살이었는지를 기억하죠.

갑자기 머리가 까마득해졌다.

— 그렇게 오래 살아야 해요?

— 싫으면 자살할 수도 있지만, 대개 안 하죠.

— 자살?

— 영화 좀 보지 그래요. 많이 나와 있는데. 말뚝이나, 은총알, 태양 말예요.

갑자기 일출이 떠올랐다. 

— 태양?

— 다른 것보다 확실하고, 순식간에 끝나서 별로 고통도 없어요. 다만 어정쩡하게 목숨을 건지면 그게 더 끔찍해요. 절대 안 낫거든요. 병신 흡혈귀라니 상상이 가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 혼란스러워졌다.

— 오늘 아침에 해돋이를 봤어요.

희정 씨는 어리둥절해 했다.

— 오늘 비 왔는데요.




공원의 일출이 시작되었다. 그날 내가 삼킨 태양처럼 뜨겁고 찬란하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내 입술은 아직 그 뜨겁고도 시원한 햇살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태양을 삼킬 수 있었을까? 희정 씨의 말처럼 변화 중에 본 환상일까? 그렇게 쉽게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기억이다. 게다가 그 때문에 나는 본래의 의도대로 죽지 못하고 흡혈귀가 되었다.

나는 그때 뭘 삼킨 걸까?

‘그날’의 기억은 혼돈의 부서진 편린으로, 오랜 기억의 지층 속에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출을 볼 때만 조금씩 날카롭게 반짝여 존재를 드러냈다. 그 조각들을 모으기 위해서 나는 일출을 찾아다녔다. 안전하게 몸을 가리고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은 계절마다 달랐고, 결과적으로 나는 일출을 찾아다니는 괴짜 흡혈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나는 지난 일출 때 마지막 편린이 지층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다른 편린을 주워 맞추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그 조각은 미처 줍지 못했지만, 오늘 본 일출이면 그 조각을 찾기에 충분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변화 이후 예민해진 감각 덕분이다. 나는 지저분한 공원 계단 밑이 아니라 너른 골짜기에 서 있었다. 거기서 나는 광부였고, 이제 막 지층에서 마지막 조각을 주워 올린 참이다. 등 뒤의 언덕에는 이미 찾은 조각을 맞춰둔 너른 판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 조각을 그 판에 끼웠다. 그리고 방금 구름에서 나온 햇볕이 판을 비추자, 진실이 떠올랐다.

“……희.”

나는 차마 목이 메어서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내가 완성한 조각판은 헤어진 원희의 얼굴이었다. 이제야 알았다. 태양을 마셨을 때 떠오른 그녀의 잠든 얼굴, 미소. 그건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내가 삼킨 죽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고 그런 설운 울음소리는 세상에 다시없을 것처럼 나는 울었다. 그러나 내 입술은 웃고 있었다.

흡혈귀는 태양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태양의 모습은 내 눈에 남아 있다. 나는 이제 어디서건 태양을 볼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2005. 02>




은림

소설가, 편집자. 오컬트 카드 제작자. 황금드래곤 문학상에서 「할머니 나무」와 「할티노」로 두 번 수상했다.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만냥금」을 게재했고, 공동 단편집인 『윈드 드리머』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환상 서고』 『앱솔루트 바디』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2』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등 다수의 공동단편집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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