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잎맥들을 닮아가는 이야기





생각해 갔던 가장 쉬운 질문은 “어떤 식물을 좋아하세요?” 였다. 책의 제목은『노래하는 숲』이며, 그녀의 소설들은 온갖 색깔의 식물들로 점철되어 있었기에, 가장 쉽게 떠오른 문장이었다. 곧바로 돌아온 대답은 적이 당황스러웠다. 


“식물 안 좋아하는데요? 식물 좋아하면 식물 키우겠지. 고양이 키우잖아.”


은림 작가는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조가 빨랐고 자주 웃었다. 때때로 곧고 가느다란 비자나무 같은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면 대체 왜 이렇게 식물을 많이 쓰신 거에요?”


당황하여 되는대로 곁가지라고 말하기도 어정쩡한 질문을 뱉었다. 너무 오래전에 쓴 소설들이라 잘 기억이 안 난다던 은림 작가는 잠깐 생각하다가, 단순하면서도 깊은 대답을 했다.

“처음 반했던 건 웅장함? 그런 거였던 것 같아요. 숲에 깊숙이 들어가면 공기가 아예 다르잖아. 사람 사이에 있는 거랑, 나무 사이에 있는 건 공기의 무게부터 차이가 있죠. 그런 것들이 좋았어요.”


나는 『노래하는 숲』의 ‘웅장함’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나는 지구 한구석에서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잎을 살랑이며 사람처럼 춤추는 것을 보았다. 놈들의 출현으로 인류가 공들여 다진 문명은 부서진 지표 포장처럼 속절없이 뒤집히고, 타르 찌꺼기 밑에서 창백하게 썩어가던 대지는 발가벗고 햇살과 입 맞추었다. 댐에 가로막혀 있던 강은 유쾌하게 바다를 향해 내달리고 멸종했던 열대 나비가 날아올랐다. 창 너머 세상은 플랜의 눈처럼 어지럽도록 오색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다.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나는 그게 다음에 올 새로운 지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 핀, 지상 전체를 뒤덮은 새로운 지배 종은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상체와 식물의 하체를 가진 꽃들이었다. 

― 「환상진화가」중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배제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웅장한’ 꿈. 「환상진화가」는 ‘지의류’인 ‘플랜’들이 인간의 세계를 잠식하는 이야기다. 소설 뒤에 부연 된 작가의 말에서, 은림 작가는 “우리가 종의 발달로 받아들이고 외워왔던 현생 인류의 계보는 절대적 진실이 아니며, 우리가 알아온 중에 가장 명명백백한 진실에 가까운 과학조차도 연구자들의 여러 가지 실수와 오류를 거쳐 추론된 과정이고 계속 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끼는 곰팡이도 아니고 식물도 아니래요. 그 미묘한 선상에 있다고. 그 애매한 관계가 너무 좋더라고요. 엽록소가 있고 없고의 차이로 이끼와 곰팡이를 나누고, 어느 단계에서는 움직이는 미모사 같은 게 되고……. 그래서 일부는 동물이 되고 일부는 식물이 되고. 성서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말이에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인류의 시발(始發)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는 식물, 하나는 동물이 되는 거죠. 늘 카인의 식물 제물을 내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나는 사람도 처음에는 식물이었을 거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처음으로 회귀하는 거죠, 그냥. 나무가 된다는 게 이질적인 게 아니고, 원래 태어났던 그 단계로 다시 가 버리는 거예요. 좀 더 원론적인, 내가 태어났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면, 변형이 아니라 완결이네요.”

은림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하는 숲』에는 인간이 식물의 형태로 변형하는 이미지가 상당수 나온다. 「할머니 나무」는 죽음 대신 나무로 변해 오래도록 생을 유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엄마꽃」은 엄마가 꽃이 되어버리는 이야기이다. 식물은 분명 생장하는 생물이지만 활동성이 부재하기에 사람들은 곧잘 그것을 망각한다. 은림의 이야기 속에서 이 생물들은 활동성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성을 ‘갈무리’한다.


사춘기 때 나는 나무가 되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했었다. 남들과 달라서 이상한 것, 나쁜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한 대로 저주이자 ‘외로움을 잊는 징벌’이라면 나무가 되는 것보다 죽는 편이 훨씬 어울렸을 것이다. 죽음만이 온전히 세상 모든 것과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되는 것은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귀가 멀고, 몸이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는 죽음처럼 멈추어 썩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는 느낌표로 살아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는 거였다. 나는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을 이제야 이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잊으려는 생각에 나무가 된 것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와 나와 함께 살고 싶으셨기 때문에 나무가 된 것이다. 어머니는 정말 근사한 욕심쟁이였다.

―「할머니 나무」중



자신의 삶을 완전히 식물로 ‘갈무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강한 여성들이 이 소설에는 등장했다. 「할머니 나무」의 서사에서 오직 여성들만이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식물로 화하는 여성들은 「할머니 나무」뿐만이 아니라 「낙오자」에도 등장한다. 「낙오자」의 주인공 목련은 성공적인 번식을 해서 씨앗을 품을 수 있는 ‘딸’을 낳는 것이 목표이며,「노래하는 숲」의 식물들은 나비를 만나서 ‘번식’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식물의 번식에 대한 질문을 했다. 처음 던진 질문과 마찬가지로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고 당혹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번식 싫어하는데! 아, 자손 남기는 거 싫어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들은 번식에 조금도 긍정적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지 않았다. 「낙오자」는 체제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번식의 임무와, 사랑에 빠지면 낙오하게 된다는 규칙 사이에서 흔들리는 ‘목련’이라는 소녀의 고통스러운 성장(혹은 낙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의 말은 “사랑이라는 헌신적 감정과 결혼이라는 계산적 제도 사이의 괴리”를 언급하고 있다.




“노래하는 숲의 꽃들이 가치 있다고 교육받는 건 오직 생식 행위와 그를 위한 부수적인 것들뿐이죠. 노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스스로의 힘으로 걷는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거죠. 토란은 나비를 기다리고 낙오자는 그 자들을 기다리고. 가장 큰 가치는 너희가 종을 위해서 번식을 해야 하므로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꾸며야 한다는 거. 그게 너무 역겨운 거예요. 우리에게 교육해주지 않는 것들, 압박받았던 것들에 대한 반항을 하고 싶었어요. 


새끼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 말고, 다른 자아실현.”



「노래하는 숲」의 토란은 식물 주제에 ‘노래’를 부른다. 동물도 쉽게 할 수 없는, 어쩌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 토란도 마찬가지로 번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비들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 게다가 토란은 쉽게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아니던가. 통통한 생김새, 맛있는 음식. 토란과 미나리, 엉겅퀴와 도토리. 「노래하는 숲」에 나오는 식물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식물들이다. 특히 토란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는 점은 특별히 주목할 만했다.


“먹을 거라던가 친근한 식물들 얘기를 쓴 건 실용성이랑 맞닿아 있다고 봐야죠. 너무 멀리 있는, 거짓말 같은 얘기들이 아니라…… 히비스커스 같이 너무 멀리 있고 예쁜 꽃 말고, 당신이 먹는 미나리가 생각을 할 수도 있어, 밥상에 올라온 토란이 노래를 할 수도 있어.”


우리는 식물이 생장하는 생물이라는 것을 망각한다고 하였다. 의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그들을 입에 밀어 넣는다. 그다지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맛있는 음식으로서. 우리가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은 우리가, 좀 더 멀리 나가자면 고대로부터 인류가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동물을 잡아먹기 위해서는 격렬한 저항을 마주해야 하지만, 식물을 앞에 두고서는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분명 인류는 수렵보다 채집에 익숙했고, 고정적인 식사를 하기 위해서 농작을 시작했다.




식물에게 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동물 역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옆에 있는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자극이 넘치는 세계 속에서 식물은커녕, 우리는 옆에 있는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곤 한다.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억압받았던 걸 생각해 봐요. 활동성을 요구하지 않잖아요. 젊고 예쁘게 앉아있으면 되는 거고. 청소년들도 다 의지가 있잖아요? 이성에 대해 생각하고 섹스 생각도 하고. 하지만 그 모든 의지를 거세시키잖아요. 없는 셈 치는 거거든요. 14세기만 해도 동물은 의지가 없는 자연의 기계인형이라고 생각했대요. 사람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거세하려고 들어요.”



토란의 노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화원의 주인인 아베는 그것을 평가 절하하며, 화원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식물은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토란의 노래는 ‘쓸모없는 재주’다. 

남들과 다른 건 좋지 않아. 다른 꽃들을 봐라. 매혹적인 장미도 우아한 나리꽃도 노래 같은 건 안 해. 그 애들은 꽃잎을 가꾸고 더 향기로워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지. 게다가 제일 중요한 나비들이 그걸 좋아할지 모르겠다. 곱고 향기롭고 꿀이 많은 건 확실히 좋아하지만. 그건 그냥 변변찮은 노래잖니. 시간도 많이 들고. 넌 아직 이파리도 부스스하고 이렇다 할 꽃대 하나 올리지 못했지? 거기에 더 신경 쓰는 편이 좋겠다. 미래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짧거든.

― 「노래하는 꽃」중


그러나 그 맛있고 단단하고 예쁜 알토란은 노래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대신 엉겅퀴의 씨알들을 키우며 자신에게 주어진 엄혹한 운명을 끝내 의지적으로 버린다. 아무도 필요 없다고 말한 그 ‘노래’를 위해서. 토란은 아이를 낳지도 않았지만 숲에 노래를 전달함으로써 결국 세상의 모든 숲의 어머니가 된다. 생물학적 번식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퍼뜨린 셈이다. 사실 문학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토란의 삶과 닮아 있다. 번식하고 자손을 낳아 종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며, 그것을 위해 이윤을 축적하고 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별개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 길을 쫓아가는 타나토스적 욕망. 은림의 소설 속에서 그 욕망은 소멸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탄생했다.




“지금 쓰고 있는 장편은 나무가 세상인 이야기예요. 사람은 나무에서 하루씩 피고 지는 꽃 같은 목숨이고….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나무 잎맥의 모양이 전체 나무와 완전히 닮았다는 거 아세요? 프랙탈이라고 해요. 사람이 사는 세상도 다 비슷하지 않아요? 나무랑 어딘가는 닮아있어요.”


최소단위가 최대단위를 복사해내는 현상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인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학교와 가정, 지역과 국가, 사회적 단위들.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큰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사된다. 우리는 그걸 종종 망각한 채, 주변의 토란과 미나리들이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밤의 숲에 가만히 앉아서 나무를 보면요, 그 나뭇가지들이 다 움직이는 것 같아요.”


은림 작가는 자신은 그린 핑거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 은림 작가의 엄지손가락의 작은 지문은 그녀가 그리는 세상 속의 커다란 잎맥들과 닮은 구석이 있을 것이었다.






세상의 틈새로 환상이 보일 때




부산역 앞에서는 누군가 계속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김주영 작가를 만나는 카페에까지 음악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나는 상당히 일찍 서울에서 출발했는데도 부산에 도착하자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하늘이 곧 오렌지색으로 물들 시간, 낮과 밤이 뒤바뀌는 시간, 아주 약간, 세상에 틈이 보일 것만 같은 그런 시간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별로 하는 게 없네요.”


김주영 작가는 깔깔거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쓰는 소설의 무게감에 비해서 정말이지 환하게 잘 웃는다.


“맞아, 특별히 뭐 하는 게 없죠.”


“심지어 자기 사고 안에서만 활동하는 애들도 있어요. 「백 마리째의 양」이나 「노래하는 늪」에 있는 주인공들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사고 속에서만 활동하잖아요. 「별들이 빛나는 밤에」도 그냥 일상을 영위하는 거 말고는 하는 게 없고. 그냥 일상 속에서 담담하게 고독을 이야기하는 정도고.”


「노래하는 늪」에서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어릴 적 친구였던 에스메랄다는 하늘에 있는 배를 타고 다니는 선장의 딸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 주인공에게 어릴 적에 상상 속의 친구가 있었나 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끄트머리에서 독자들은 아주 조그맣게 놀란다.


“어릴 때, 자기가 마법사의 딸이라고 하던 일도 기억나요? 자기 이름이 에스메랄다라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제 아빠 오고 난 뒤엔 그 이름을 한 번도 말 안 합디다.”

“제가 그랬어요?”

“그랬어.” ― 「노래하는 늪」중


주인공과 에스메랄다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꿈을 꾸었던 것들은 모두 주인공의 머릿속으로 귀착된다. 주인공이 온전히 다스리고 있었던 세계의 그림이 완성되며, 그 작은 세계의 넓이는 끝 간 데 없이 거대해진다. 다만 주인공의 시선 밖에서 보았을 때는 그 놀라우리만치 거대한 세계가 보잘것없이 작았다는 것도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다.


“왜 그럴까요? 환상소설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큰 이야기들이잖아요. 아포칼립스물이라던가, 시공간이 무너지는 거대한 시대물이라던가, 세계를 크게 쥐락펴락하는 이야기들. 근데 주영 님 소설에서는 그런 환상이, 마녀가 나타나서 세계를 악으로 물들이는 게 아니라 초콜릿을 만들잖아요(「어떤 밸런타인데이」). 늪은 세상이 아니라 한 마을을 찾아오고(「노래하는 늪」),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은 그 능력자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결국엔 일반 사람들에겐 알려지지가 않고(「사방들은 기다린다」). 그 점이 어떤 황홀감을 주는 것도 분명 사실인데, 그래도 좀 특이하지 않아요?”


“소재를 얻는 게, 문득 일상 속에 있다가 환상에 뛰어드는 것들을 떠올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소재가 일상적이고. 밤에 야시장 가 본 적 있어요? 그런 데 가면 사람들 표정만으로도 여기에 사람이 아닌 무언가 끼어들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제가 저번에는 차를 타고 가는데, 내비게이션이 고장이 나서 고가도로 한가운데에서 벽을 막 뚫고 가라고 나오는 거예요. 너무 황당해서 얘가 미쳤구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김주영 작가도 잠깐 웃더니,


“그런데 미친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사실 이게 고장 난 게 아니라 정말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길을 얘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환상이라는 게 멀리, 여기랑 다른 세계에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아주 가까이 있는데 어느 날 문득 세상이 뒤틀려서 그게 보일 때가 가끔씩 있는 그런 거 말예요. 수많은 용오름 중에 하나쯤은 진짜로 용이 올라가는 걸 수도 있는데,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가 않고.”


유클리드 기하학에 익숙해져서 세상이 점 · 선 · 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눈에 요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끔 어쩌다가 무언가 뒤틀렸을 때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세상의 틈새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소설 속에는 세상의 틈새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존재들이 있다.



초월자(超越者)


“작가들마다 좋아하는 종류의 환상들이 있잖아요. 슈퍼히어로물을 좋아한다거나 좀비물을 좋아한다거나. 그런데 그 환상들에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거든요. 그런데 꼭 김주영 작가님 작품에는 모든 것에 달관한 이종의 존재가 많이 나와요. 천사(「파국」), 그림 속의 사람(「문이 열린다」)……. 이런 환상들에 특별히 매료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슈퍼히어로나 뭐 다른 걸 보면 전능한 힘을 가지고 뭔가를 막 바꾸는데, 그런 존재보다는 지혜롭게 아예 초월한 존재가 많죠. 모든 것에 대해서 이 우주의 섭리가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 이런 초월자를 꿈꾸는 게 있어요. 제가 좀 제 또래들보다 현실에 발을 안 붙이고 있어서. 사실 제 나이면 보통은 삶에 굉장히 물들어 있거든요. 결혼생활에 대해 고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어떤 학교를 보낼 것인가 계획하고. 그런데 저는 그렇지가 않다 보니까 추상적인 고민을 많이 해요. 인생이란 뭘까.”


느닷없이 세계적 주제가 툭 튀어나왔다. 그러게, 인생이란 뭘까.


“사람은 혼자 와서 혼자 가죠. 그런데 사람들은 엄청나게 발버둥을 쳐요. 삶이라는 건 짧은 순간이고 혼자 온 자들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순간인데, 왜 이렇게 발버둥을 치면서 사는 걸까. 최근에 엄기호 씨의 책을 읽었어요. 현대 사회는 ‘함의 과잉’ 시대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공감 가더라고요. 지금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데 이 시대는 너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고 강요한다고, 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발버둥을 치는 게 내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잖아요. 그런 걸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자기를 비운다느니 내려놓는다느니 그런 말들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는데, 요즘 생각해 보면 사람이란 자기가 아닌 누군가가 되려고 계속 발버둥 치다가 죽을 땐 결국 자기가 되어서 죽는 것 같아요.”


언젠가 내가 돌아올 날을 기다린 것처럼 가지런하게 정리해 둔 내 물건을 보면서 외할머니가 줄곧 무언가를 몹시 기다리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잠들며 내일을 기다리고, 아침엔 버스와 지하철을 기다리고, 출근해서는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만나기로 한 누군가를 기다리고, 생일을 기다리고, 결혼식을 기다리고, 첫애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집 장만할 날을 기다리고, 돌아오는 명절에 찾아올 자식들을 기다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삶은 모양새만 바꾼 기다림에 잠식되어 간다. ― 「노래하는 늪」 중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우주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잖아요. 인생이라는 건 와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수용하게 되면, 성숙하고 끝이 나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기를 너무 힘들어하죠. 그 사실은 굉장히 큰 위안일 수도 있는데. 자기가 대단한 걸 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너무 버거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집착들에서 벗어난 존재들에 대한 환상이 있어요. 뭔가를 성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자기 존재가 뭐가 되려고 하지도 않고 특별히 뭘 하지도 않지만 오롯이 스스로의 존재만으로 설 수 있는 존재에 대한 환상. 초월한 존재들.”



그리고 위무받기


신 · 천사 · 신선 등의 존재는 인간과는 다르게 “오롯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들이 종교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다. 예술과 종교는 매우 닮아있는 양식들이다. 삶에 있어서 이들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술이 없어도 우리는 밥을 먹고, 신을 믿지 않아도 숨을 쉴 것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그것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밥을 먹을 수 있게 하고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무엇이 필요하다.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듯이, 아니, 김주영 작가의 시선은 장미조차도 넘어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예술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것이기도 하다.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은(그것은 환상일 수도 있을 것이고 진리일 수도 있을 것이고 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든 고통을 견디기 위한 진통제로서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의 핵심을 폭발시키는 맥락에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것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김주영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아포칼립스물을 쓰는 사람들한테는 환상이 일상을 뒤흔드는 악재 · 재앙으로서 기능하잖아요. 하지만 주영 님 소설 속의 환상은 언제나 다정해요. 직접적으로 주인공의 삶을 뒤흔드는 역할이 아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초월적인 존재니까. 그 존재는 따뜻하게 감싸 안고, 다 그런 거야, 이렇게 달래준 다음에 갈 수 있죠.”


그림 속에 있는 문이 열렸다.

그림 속에 있는 문에서 그가 나왔다.

― 네 할아버지 말씀대로구나. 인간은 이렇게 빨리 자라는구나.

그가 말했다. ― 「문이 열린다」중


인간의 고통이란 비역사적이다. 그 자신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고 견딜 수 없다고 할지언정, 한 인간의 고통은 우주적 규모로 봤을 때는 아주 작은 티끌만도 못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고통은 우주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는 정말 하잘 것 없는 편린이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이나 고독이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괴로움은 하나의 삶에서 끝이 날 것이며 그것은 우주적 파장으로 번지지 않는다. 그저 그 안에서의 소용돌이일 뿐이다. 그것은 김주영 작가의 소설 안에서 일종의 종교적 깨달음이자 큰 위안이다.


“처음 이런 종류의 환상을 생각하셨을 때는 언제예요?”


“그게…… 참.”


멋쩍게 웃었다.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돌아가면서 소설을 써서 공책 돌려보고 뭐 이런 거였어요. 그때 제일 재밌게 썼던 게 주인공이 우리였어요. 우리의 일상은 단조롭고 고통스러웠는데, 환상들이 우리를 위로해 준 거죠. 친한 친구들 일곱 명이 등장해서 기억이 봉인된 채 미래세계 어딘가에서 옛날의 행복했던 기억을 찾아 모험을 한다던지.”


“……이고깽이요?”


여러분, 김주영 작가의 첫 소설은 이고깽이었다고 합니다. 대충 그녀가 쓰던 소설 속 미래세계의 중학교에는 아이들을 가두는 지하 감옥소가 있었고, 거기로 가는 비밀통로는 교감 선생님 자리 밑에 있었으며, 친구 중 한 명의 아버지는 대단한 킬러인데 학교 뒤편에는 무시무시한 독버섯이 자라고…….


“출발점도 그랬지만, 지금도 보면 제 소설에는 주인공들이 환상과 현실에 양쪽 발을 걸치고 정체를 숨기면서 살아가는 것들이 많이 나와요. 생각해 보면 제 삶 자체가 그렇네요. 어떤 사람들은 작가라는 정체성만을 갖고 살아가는데, 저는 다른 직업도 있으니까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있고. 이 두 가지를 잘 혼합을 못 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현실을 영위하면서 다른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게 압력이 상당하잖아요. 제 본질의 자유로움을 현실에서 가두려고 노력해야 하니까, 그 탈출구로 환상을 가지고 오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놀랍게도 그녀의 환상은 작가 자신에게도 유효했다. 이 농도 짙은 환상들은 여전히 작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문의 힘


“다가오는 계절은 나라와 도시마다 다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멸종된 존재와 사람의 공백을 채우다 떠나버린 것들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돌아오는 여름이 다시 여름인 것처럼 돌아오는 사랑도 여전히 가슴이 벅찬 설렘이고, 등을 돌리고 가는 봄이 여전히 봄인 것처럼 떠나는 사랑도 여전히 아른하고 나른한 그리움이다.” ― 「돌아오는 여름이 다시 여름인 것처럼」중


“시멘트로 매끈하게 단장한 학교 뒤편을 본 나는 늙어버린 첫사랑을 만난 사람처럼 우울해졌다.” ― 「노래하는 늪」중


“그저 불꽃 가운데에서 빛나는 소년을, 잃어버린 사랑을 볼 뿐이었다. 그러자 풍경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오로지 사랑했던 남자만이 남았다. 그로써 그 남자는 온 세상이 되었다.” ― 「불의 춤」중


모든 문장을 다 인용할 수 없음이 통탄스럽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쩌면 이런 문장을’이라고 생각한 구절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가장 격한 감정에 떨어져 있을 때 그녀의 문장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훌쩍 뛰어오른다. 그녀의 문장에는 주인공의 감정에 완전히 동화되기보다는 독자 자신도 어떤 초월자처럼 상황을 관조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요즘은 문장 고민을 많이 해요. 구한나리 님이 좋아해서 최근에 『혼불』을 읽었는데, 문장을 정말 예쁘게 쓰시더라고요. 이렇게 막 갈아가지고, 쇠에다가 석필 같은 걸로 ‘크아아아아아!’ 이렇게 쓴 느낌이 있어요.”


크아아아아……


“그래, 새겨 넣은. 문장이 읽으면 부드럽고 아름다운 건 알겠는데 읽고 나면 그런 ‘크아아아아아!’ 하고 새겨 넣은 느낌이 있으니까 나중엔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문장이 어떤 건지에 대해 많이 느꼈어요. 읽을 때는 아주 부드럽고 매끈하게 읽히고, 표현이라든지 수사가 너무 아름답고. 적어가면서 읽었어요. 시를 좋아해서, 시어라던지 좋은 문장이 있으면 메모해 두기도 해요.”


“좋아하는 시인 있으세요?”


“기형도랑 김수영. 박주택 시인도 좋아하고 최근에는 심보선.”


「슬픔이 없는 15초」이야기를 하다 둘이 함께 탄식을 내뱉었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15초 정도가 지난다/ … /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 / 과거가 뒷걸음질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 /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심보선,「슬픔이 없는 15초」중


어느 날, 나의 죽음이 놓이는 날에도 사람들은 쉼 없이 걷고 자동차는 맹렬하게 달리겠지요. 그 날에도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안도할 거예요.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올랐어요. 그리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당신을 보았어요. ― 「별들이 빛나는 밤에」중


김주영 작가의 문장을 내가 사랑하는 데에는 김주영 작가가 사랑하는 시인들을 사랑하는 것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사라지는 길을 향해 걷고 있으며 언젠가 카메라에 죽음을 찍히고야 말 것이며 삶의 어느 순간 선물 같은 문장들이 우리의 가슴 속에 내리꽂힐 것이다. 이 책이 그렇듯이.


차기작에 대해서 묻자 김주영 작가는 눈을 빛내며 전혀 일상적이지도 않고 스케일도 무지막지하게 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구난을 타개하기 위해 타임슬립을 해서 과거에서 인간들을 끌어오는 굉장한 스케일의 시대극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인터뷰를 마칠 때쯤에는 분명 이런 굉장한 스케일의 시대극에서도 그녀는 아주 예민한 소멸의 뿌리를 만지작거리고, 우리의 가슴에 있는 자그마한 상처들을 우리가 돌아보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페이스 오페라 쓸 거예요.”


“독자들한테 하고 싶은 말은 어떤 게 있으세요?”


“읽고 나서 옆에 소개 많이 해 주세요. 읽고 나서 마음에 짠하게 남는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남는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인생이라는 공포 영화에 감금당한 자들의 하나뿐인 탈출구


녹취록을 풀면서 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가 가득한 녹음파일에서 단어들을 골라내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써야만 했다. 미안하게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의 대부분은 내 목소리였다. 권민정 작가를 처음 만난 날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얼굴 근육이 땅기도록 처웃고 집에 돌아온 기억들이 생생하다. 내가 노잼이라 그녀의 이 무지막지한 발랄함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으나, 아마 그 발랄함은 책을 산 사람들은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마음 편히 전달해 볼 생각이다.

언젠가의 12월, 나는 그녀를 포함한 여러 작가들과 함께 연희동에 위치한 SF&판타지도서관에서 권민정 작가가 추천한 영화 <옴 샨티 옴>을 관람했다. 작고 마른 체구의 그녀는 “인도 영화를 보면 진이 빠져서 안 먹을 수가 없다니까요!”라며 엄청난 양의 음식을 주문했고, 나는 영화를 보다 그녀의 예상대로 진이 빠져서 음식을 주구장창 먹어댔다. 영화 하나에 멜로, 스릴러, 호러, 코미디, 뮤지컬을 한꺼번에 다 때려넣어, 그야말로 서사의 에너지가 대폭발하는 경험이었다. 『우주화』로 묶여나온 이 책을 보면서 나는 그때 그녀가 보여주었던 그 영화를 생각했다.

서사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경험에 대해서.


“권민정 작가한테 엽편이란?”

“농담.”



엽편은 농담


권민정 작가의 소설에는 당연히 여러 특징들이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라면 역시 ‘엽편의 여왕’이라는 점일 것이다. 작품집이 묶여나온 작가 중에 목차가 이렇게 긴 작가가 대체 한국에 얼마나 될 것이며, 엽편이라는 게 그다지 많이 생산되지 않는 이 나라의 문학적 환경 속에서 이렇게 엽편을 주구장창 일관되게 써 온 작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내 읽음이 짧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권민정 작가 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 또 아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그와 권민정 작가의 대담을 주선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엽편葉片이라 함은, 나뭇잎 한 장에 다 쓸 수도 있을 법한 짧은 소설을 뜻하는 말이다. 예상을 뒤엎는 놀라운 결말이 ‘꽁트’의 공통적 특징이다. 짧고 간결하되 명확한 서사 구조,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할만한 일상적 상상력이 필요한 장르다. 엽편이 유난히 많다는 질문에 대해, 권민정 작가는


“제가 글을 길게 못 써요.”

  

(스포일링 있음. 반전이 중요한 소설들이라 가립니다.)


이 짧은 글들은 뒤에 가서 완전히 지금까지의 서사를 뒤집어버리는 엽편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독자를 화들짝 놀라게 한다. 이런 식의 ‘서프라이즈’에는 긴 글은 그리 적합한 매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권민정 작가의 더 굉장한 점은 “그거 놀라라고 한 거 아닌데?”의 뻔뻔스러움이다.


“글 쓰고 나면 사람들이 저보고 자꾸 성격 나쁘다고 해요. 남들은 비극이라고 그러는데, 저는 해피엔딩으로 쓴 거고,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이를테면?”


“아예 의도랑 다르게 읽히는 경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K씨!”


「K씨의 개인사정으로 이번 호의 연재는 쉽니다」의 뒤에 달려 있는 작가의 말은 “마감은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서 우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라고 쓰여 있다.


“저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제길 마감 따위, 글쓰기 싫어!’ 같은 거였는데, 사람들이 죄다 ‘훌륭한 작가의 귀감입니다’ ‘정말 치열한 작가군요’이런 소감이나 내놓고! 아무도 그런 얘기를 안 해주고 죄다 정반대의 얘기를…….”


“기사의 사랑도! 난 페미니즘 소설인 줄!”


(스포일링 있음. 반전이 중요한 소설이라 가립니다.)


“뭐…… 의도랑 다르게 읽히는 경우는…… 많으니까요…….”


이건 심하지만.


“사실 제 의도를 알면 안 돼요! 그래서 사실 작가의 말을 길게 쓰면 안 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전 아무 말도 하면 안 돼요…….”


사실 그 능청스러움이 이 엽편의 농담에 불을 활활 지피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능청은 세상에 없는 환상의 동물 휴가를 잡으러 간다는 내용의 엽편,「휴가」같은 소설들로 연결된다.



도망갈 수 없는 영화관에서 냉소하기


독자의 기대를 자꾸 배신하는 바람에 성격 나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는 작가에게 나는 돌직구를 던졌다.


“작가님은 왜 성격이 나빠요? 왜 자꾸 빈정거려요?”


“거리두기?”


“음?”


“저는 예를 들자면 공포영화를 진짜 못 봐요.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상황이 되면 필사적으로 자기 최면을 걸어요. 이건 화면이야, 소품 지금 준비하고 카메라 돌아가고 있고, 피 몇 리터 만들어가지고 지금 아유 스탭들 팔 빠졌겠네, 이러면서 봐야지 저는 그걸 볼 수가 있는 거예요.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걸 정면으로 보면 너무 힘들잖아.”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선배들이 겁이 많은 날 놀려줄 심산으로 강의실을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공포영화 감상회를 연 적이 있었다. <디아이>라는 태국영화였고, 나는 고통스러워하다가 엠피쓰리를 꺼내서 귀에 꽂고,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를 틀었다. 그 순간 공포였던 화면은 순식간에 코미디가 되었다.


“나도 핑클 들은 적 있어요. 핑클 들으니까 계속 웃음이 터지더라.”


“그쵸,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게 이상한 포인트에서 빵빵 터져서 웃으니까 사람들이 엄청 이상하게 보기도 하고. 이다음에서 피가 나오겠지, 아싸 맞췄다! 어쩜 저렇게 나의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가!”


“현실의 공포에서 도망가는 거구나.”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거죠. 인생은 억지로 끌려들어 간 영화관과 같아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어요. 그냥 계속 봐야 돼.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나는 여기서 어떻게든 도망갈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냉소하면서.”


도망갈 수 없는 영화관. 나는 크게 위로받았다.


(스포일링 있음. 반전이 중요한 소설들이라 가립니다.)


영원한 사랑은 뒤틀리고, 휴가는 갈 수가 없고, 분노의 에너지는 흐트러지고 말지만 우리는 그 앞에서 낄낄대고 웃을 수 있다. 바로 그것이 권민정 작가의 소설이 가진 냉소의 힘이었다.


“모든 것은 변화하지만, 변했으면 하는 건 꼭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건 꼭 변하잖아요?”



무無를 탐색하기


물론 권민정 작가의 소설이 이렇게 하나같이 가볍고 유쾌하기만 한 건 아니다. 「나하의 거울」이나 표제작인 「우주화」같은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계관이 한 축에 또 존재한다. 침묵을 탐색하는 음악의 구도자 이야기를 다룬 「나하의 거울」을 읽고, 나는 얼마 전에 새로 발명되었다는 “가장 검은색”에 대한 기사를 떠올렸다. 감각을 한다는 것은 감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반으로 정의될 수 있다. 들린다는 것은 들리지 않는다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유有는 무無의 증거이다. 


“예술이라는 거 자체가 좀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사실 어디로 창작을 할 때 이상으로 삼는 게 있잖아요. 근데 정확하게 그게 잘 보이진 않아요. 그래도 뭔지는 모르지만 그곳을 향해서 가야 되고, 그곳을 향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리를 놓아야 하고. 그렇다보니까…… 원론적으로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우주화의 색깔은 도무지 무슨 색깔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주인공이 모든 걸 감내하고서 결국 꽃을 피우려는 행위는 그 세계의 법칙 속에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꽃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세계와 어떤 의미의 소통을 이루고 소멸을 이룬다.


“우주화는…… 언어라는 수단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언어를 이렇게 바꿔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언어를 통해 세상을 지각하고 언어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아마 글을 쓰는 사람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작가라는 존재는 어느 순간 지각과 해석을 넘어 언어로 어떤 세계를 창조해나간다. 글로 관계를 구축해낸다. 권민정 작가는 친구가 없어서 친구도 글로 배워서 그렇다며 키득거렸다.

마지막 단편인 「거울바라기」의 주인공 미라의 눈 속에서는 “거대한 새였고, 뱀이었고, 용이었고, 범이었으며, 거북이이자 사람”인 빛이 하나 빠져나간다. 모두가 거울을 보듯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커다란 무無가 그 순간 형상을 가지게 된다. 권민정 작가의 언어는 바로 그 언어를 사용하고 읽어나가는 우리를 이야기한다. ‘존재’가 ‘부재’를 전제한다면 마찬가지로 ‘부재’ 역시 ‘존재’를 전제한다. 텅 비어있는 공간은 바로 그 공간에 비치는 것이 우리의 감각들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계신가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권민정 작가는 박장대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계시나요? 거기 계십니까? 제 얘기 들리시나요? 여기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사 주세요…….”


나는 또 한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고 처웃어댔다. 이 무시무시한 공포 영화 속에서 대체 그녀가 없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쏘쿨하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연습하세요. 전 중학교 때부터 연습했어요. 청소년이 아니라서 좀 힘들 수도 있겠지만. 단, 연습해서 비뚤어지고 나면 원래의 자신으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요.”


각오를 하고 권민정의 드립교실에 발을 들여볼까 생각 중이다. 아무튼 여러분, 여기 그러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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