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을 할 때마다 난감해진다. 잘나가는 작가의 작품들은 비싼 선인세 때문에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형편이고 혹 큰마음 먹고 내보겠다고 한들 마케팅 비용이 걱정된다. 출판업계에 뛰어들기 전에는 작품만 좋다면 굳이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더라도 잘 팔리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좋은 작품은 팔린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출판사를 차린 지 3년이 지난 지금 그런 순진한 생각은 많이 퇴색했다. 한 작품을 기획해서 책을 만드는 동안에는 모든 독자가 이 책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착각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거대 자본을 들여 홍보에 쏟아붓지 않은 이상, 소녀시대가 그 책을 들고 TV에 나오지 않는 이상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그 책이 출간되었는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다. 

200편이 넘는 기획 작품 리스트를 수시로 업데이트하며 이 책을 내볼까, 저 책은 어떨까 머리를 쥐어뜯고 고민해보지만 결국은 선인세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제작비가 덜 드는 작품을 고르게 된다. 물론 좋은 작품이라는 믿음이 가는 작품에 한해서.


국내에서 추리소설 장르는 근 10년 동안 비약적인 출간 속도를 보여주었다(국내 저작은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셜록 홈스조차 완역되지 않았던 국내 추리소설 시장 상황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단히 빠른 행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거품이 많이 빠지긴 했으나 한때 봇물 터진 듯 출간되던 일본 미스터리를 보라. 요즘은 영미권이나 북유럽 등에서 출간되는 작품들을 현지 출간과 동시에(번역에 걸리는 시간차를 감안하면) 국내에서도 바로 읽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해외에서 좀 뜬 작품이라면 여지없이 번역 출간된다. 문제는 특정 작가와 특정 작품 위주로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좀 팔린다는 책이 나오면 많은 출판사에서 같은 장르의 작품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온다. 『다빈치 코드』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여타 많은 출판사에서 비슷한 유의 팩션을 쏟아냈다. 지금도 여전히 잘 팔리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히트하면서 유럽 추리소설들이 줄을 이어 출간되었고 현재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좋다면 좋은 현상이지만 한두 작품이 성공적인 판매로 이어졌다고 해서 비슷한 유의 작품들이 마구잡이로 출간되는 현상은 경계해야 한다. 잘 팔린 작품들이 반드시 좋은 작품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고 몇 편의 성공 이후 출간된 작품들은 소위 아류작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한두 작품으로 인해 추리소설 시장이 확대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추리소설을 꾸준히 구매하는 평균 추리소설 독자 수를 생각하면 추리소설이라는 한정된 시장에서 한두 작품이 차지하는 위상이 커졌을 뿐, 파이 전체가 커졌다고는 볼 수 없다. 몇몇 베스트셀러가 추리소설 시장을 견인해준다면 매우 바람직하고 반가운 현상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판매가 따라주지 않는 무분별한 경쟁은 선인세만 부풀릴 뿐이지 장기적으로 추리소설 시장 확장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같은 이유로 특정 작가의 작품이 잘 팔리면 모든 출판사가 한 작가에게로 몰리며, 마찬가지로 특정 작가의 선인세는 천정부지로 뛴다. 어차피 가난한 출판업자의 입장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 같은 이야기지만 이런 현상은 기획을 더욱 어렵게 만들며 특정 장르와 특정 작가 위주의 출간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독자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국내 추리소설 시장에는 시대적 간극 또한 존재한다. 중간 시기를 거치지 않고 고전물에서 바로 현대물로 이어졌기 때문에 애피타이저에서 바로 디저트로 넘어온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고전물과 현대물 사이의 작품들이 전혀 출간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5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발표된 양질의 추리소설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고 최근 작품들에 비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영미권과 일본의 최근작들에 편중된 출간 경향과 중간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이 구닥다리 고전으로 취급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5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의 좋은 작품들이 출간되기는 요원해 보인다. 국내의 추리소설 독자들은 고전과 현대 사이에 존재하는 좋은 작품들을 느긋하게 음미할 기회를 잃었다. 

샘 스페이드와 필립 말로에서 파생된 많은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없었다면 해리 보슈를 읽을 수 있었을까. 해리 보슈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캐릭터가 아니다. 해리 보슈를 먼저 읽기 시작한 독자들이라면 트래비스 맥기나 스펜서 같은 탐정들이 상대적으로 촌스럽게 느껴질 법하다. 휴대폰이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사건을 이리저리 헤매며 온갖 고초를 다 겪는 87분서 형사들을 보고 한심해하기도 하며 CSI 이후 첨단 과학수사의 전능함을 목도한 독자들은 돋보기를 들고 발품을 파는 탐정들이 답답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선정적인 묘사와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 만큼 빠르게 전개되는 현대 스릴러를 먼저 접한 독자라면 파일로 밴스 같은 탐정을 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다. 반전이 뛰어난 몇몇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추리소설에 대한 별다른 이해 없이 추리소설에 빠져든 독자들은 반전이 없는 작품은 추리소설로서 가치가 없다는 인식을 갖기도 한다. 굳이 반전이 필요하지 않은 어떤 작품을 두고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강력한 반전이 없기 때문에 추천을 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어이가 없던 적이 있다.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학문도 아닌 바에야 한 번 읽고 마는 추리소설에 이해까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추리소설에 흥미가 끌려 계속 읽고 싶다면 한 번쯤 장르의 발전 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않을까. 추리소설은커녕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셜록 홈스와 뤼팽 정도는 어린 시절 통과의례처럼 읽어봤음직하다. 여전히 추리소설에 애정이 남아 있다면 수수께끼 풀이 위주의 판타지성 짙던 추리소설이 사회상이 반영된 인물 중심의 범죄소설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짚어 보는 근사한 경험을 해 보자.

최근에 추리소설에 관한 괜찮은 이론서도 몇 편 출간되었으니 한 번쯤 훑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휴대폰이 없다고, DNA가 뭔지 모른다고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명작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실험 가방을 들고 다니던 손다이크 박사로부터 어떻게 CSI까지 흘러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가난한 출판업자의 고민을 덜어준다는 의미를 포함해서.




박세진

취미가 일이 되면서 취미가 없어진 장르문학 출판사 '피니스아프리카에' 대표

www. finisafric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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